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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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기대(善騎隊)

서지사항
항목명선기대(善騎隊)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장용영(壯勇營), 총위영(總衛營), 무위소(武衛所), 별장(別將), 선기장(善騎將)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후기 왕이 머무는 곳이나 어가(御駕)를 호위하던, 말을 잘 타거나 특별한 기예를 가진 군인.

[개설]
선기대는 왕의 친위부대인 정조대 장용영(壯勇營)·헌종대 총위영(總衛營)·고종대 무위소(武衛所) 소속의 말을 잘 타거나 특별한 기예를 가진 군인으로, 어가를 호위하거나 왕이 머무는 곳을 시위(侍衛)하는 임무 등을 담당하였다. 선기대는 별장(別將) 1명과 선기장(善騎將) 3명을 비롯하여 좌초·중초·우초의 3초(哨)로 구성되었는데, 초는 약 100명을 단위로 하는 군대 편제다. 대부분의 군인은 겸사복(兼司僕)과 양인(良人)이었으며 서울에 거주하였다. 정부는 어가를 호위한 선기대에게 쌀 등을 주어 노고를 위로하였고, 매달 시행하는 중순(中旬)이라는 시재(試才) 등을 통해 포(布)·무명[木] 등을 상으로 내려 무예를 열심히 습득하도록 격려하였다. 선기대는 1802년 장용영, 1849년 총위영, 1882년 무위영이 혁파될 때 함께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장용영 내영에 설치된 선기대는 『장용영대절목』에 의하면 1787년(정조 11) 27명으로 시작하여 1793년에는 3초 345명의 조직을 갖추었는데, 마대(馬隊)를 본떠 말을 타는 재간을 가졌거나 특별한 기예를 가진 자로 선발하였다[『정조실록』 17년 1월 12일]. 선기대는 왕이 행차할 때 어가를 전방 또는 후방에서 호위하거나, 왕이 머무는 곳의 문 밖에서 사방을 둘러싸서 왕을 시위하는 임무 등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아울러 장용영처럼 왕의 친위부대인 헌종대 총위영과 고종대 무위소의 선기대도 같은 목적에서 설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선기대의 조직은 1880년(고종 17) 작성된 무위소의 『선기대군안(善騎隊軍案)』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선기대는 3초로 구성되었고, 최고 지휘관인 별장 1명과 선기장 3명을 비롯하여 좌초 120명, 중초 120명, 우초 120명 등이 소속되었다. 별장은 종2품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자로 임명하였고, 휘하에는 서자지[書字的] 4명과 패두(牌頭) 1명을 포함하여 42명이 배치되었다. 좌초·중초·우초를 지휘하는 3명의 선기장은 변방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당상관으로 선발하였으며, 1초에는 서자지·패두·표하군·인기수(認騎手)·고수(鼓手) 각각 1명, 기총(旗摠) 3명, 대총(隊摠) 9명을 비롯하여 총 120명이 설치되었다. 선기대 402명은 모집하거나 훈국·어영청·금위영·장막군·등롱군·속오군 등에서 이속되었으며, 신분은 겸사복(兼司僕) 114명, 출신(出身) 4명, 양인(良人) 284명이었고, 2명을 제외한 400명이 서울 출신이었다. 한편 장용영과 총위영의 선기대는 각 초의 전체 인원수 등에서 무위소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3군영 선기대의 조직은 매우 유사하다.

선기대는 왕이 행차할 때 어가를 호위하거나 왕이 머무는 곳의 문 밖에서 시위하는 역할 등을 담당하였다. 실제로 1794년(정조 18) 정조가 현륭원에 행차할 때 장용영 선기대 100명은 보군 1초 등과 함께 어가의 뒤를 호위하였고, 1795년 정조가 경모궁에 거둥하였을 때 선기대 20명은 문 밖에서 주위를 둘러싸서 왕을 시위하였다. 아울러 1846년(헌종 12) 대가(大駕)종묘(宗廟)로 행차할 때 총위영 선기대 1초는 훈국(訓局)의 마군 3초 및 보군 8초와 함께 대가의 후방을 호위하였고, 1875년(고종 12) 고종이 칙사(勅使)를 맞이하기 위해 거둥할 때 무위소 선기대 1초는 훈국 마군 1초와 함께 어가의 전방을 시위하였다. 이렇게 어가를 호위한 선기대에게는 1명당 쌀 2말을 주는 등의 조치로 노고를 위로해 주었다.

아울러 서총대(瑞蔥臺)에서 유엽전(柳葉箭)이나 기추(騎芻) 등을 시험 보아 포·무명 등을 상으로 주고 매달 시행하던 시험인 중순 때 세 번 수석하면 별무사로 채용하였다[『정조실록』 21년 윤6월 2일]. 또한 1초에서 5명 이상 급제자가 나오면 해당 지휘관의 품계를 올려 주는 등의 상을 줌으로써 무예를 진작시키고 조련의 질을 향상시키려 하였다.

그 밖에 무위소 선기대 2초는 1882년 왕세자의 친영(親迎)중군(中軍)의 통솔을 받으며 보군 600명과 함께 여(輿)를 앞뒤에서 호위하였고, 정조대 부료무사(付料武士) 2명의 통솔을 받는 선기대 20명은 입직(入直)하여 궁성을 순찰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변천]
장용영 선기대는 『장용영대절목』에 의하면 1787년(정조 11) 27명으로 시작하여 1788년 88명, 1791년 115명, 1793년 115명이 늘어나, 3초 345명의 조직을 갖추었다. 그러한 사실은 1798년 비변사의 주장이나[『정조실록』 22년 10월 19일], 정조의 행장(行狀)에서 3초가 설치되었다는 지적을 통해 확인된다. 그러나 1802년 장용영이 혁파될 때 선기대 2초만 훈련도감의 마병에 환속된다는 점에서[『순조실록』 2년 2월 7일] 실제로는 3초를 설치하려던 방침과 달리 1초가 설치되지 않았거나 이미 1초가 다른 군영으로 이속된 것으로 추측된다.

아울러 1846년(헌종 12) 장용영을 모방한 총위영이 창설되면서 훈국 마병을 이속시켜 선기대 3초 357명이 설치되었으나, 1849년 헌종이 죽은 후 총위영이 총융청으로 복원되면서 폐지되었다. 이어 1874년(고종 11) 장용영·총위영을 본뜬 무위소가 창설되면서 훈국·어영청·금위영에서 이속된 군인 등으로 선기대 3초 360명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1882년 무위소를 통합한 무위영이 혁파되면서 선기대도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장용영대절목(壯勇營大節目)』
■ 배항섭, 『19세기 조선의 군사 제도 연구』, 국학자료원, 2002.
■ 최효식, 『조선 후기 군제사 연구』, 신서원, 1995.

■ [집필자] 서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