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후기에는 정규직의 무관이 아닌 일반 군관에게는 급료가 없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그중 시험을 치러 급료를 받게 되는 자리에 배치하는 경우 이를 부료군관이라 하였다. 부료군관은 용호영과 총융청에 두었는데, 용호영의 부료군관은 기본적으로 북쪽 지방의 무사들을 우대하기 위한 제도로 처음 나타났다. 1700년(숙종 26) 2월 북관(北關)의 무사들 중 우수한 자를 한량(閑良)과 출신(出身)을 논하지 않고 용호영의 전신인 내삼청(內三廳)의 부료군관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였다[『숙종실록』 26년 2월 10일]. 총융청의 부료군관은 10명으로 연융대(鍊戎臺)의 군관 중에서 선발하였다. 1757년(영조 33) 북한산성의 경비를 위해 설치한 경리청(經理廳)이 총융청에 합쳐지면서 부료군관 20명이 총융청에 이속되었다.
[담당 직무]
용호영의 부료군관은 별부료군관(別付料軍官)과 동일하게 왕의 호위와 궁궐의 시위를 담당하였다. 총융청의 부료군관은 연융대 혹은 북한산성에서 입직하거나 근무하였다.
[변천]
숙종 중반 이후 서북 별부료군관 제도가 창설되면서 용호영의 별부료군관이 최초 80명에서 120명으로 늘었다. 이들 중 매월 병방(兵房)에서 유엽전(柳葉箭) 10순(巡) 즉 50발을 발사하여 명중한 화살의 수가 많은 순서대로 청천강 이북과 관북(關北)에서 각각 10명씩, 청천강 이남과 남관에서 각각 5명씩 모두 30명을 뽑아 부료군관으로 채용하였다. 총융청의 부료군관 10명과 북한산성의 부료군관 20명도 궁술을 시험하여 성적에 따라 채용하였다. 북한산성의 부료군관 중 3명은 산직감관(山直監官)으로 임명하여 급료를 지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