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① 보군(步軍)은 말을 타지 않고 걸어 다니며 전투를 하는 군병으로서 『조선왕조실록』 등의 자료에는 보병과 거의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보군보다는 보병이 다소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보병은 기병과 상대되는 용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보군은 특정한 소속이나 지역 등과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조선초기 지방군의 경우 한성과 제주의 3현(縣)에만 마군(馬軍)과 함께 보군이라는 병종이 있었고, 다른 지역에는 시위군(侍衛軍), 진군(鎭軍) 등의 병종이 있을 따름이었다[『세종실록』 지리지 전라도 제주목]. 『계축진설(癸丑陣說)』과 같은 조선전기 전술에서는 기병에 비해 보병의 전술적 비중이 낮았으므로 보병이라는 명칭보다는 보졸(步卒)과 같은 명칭이 사용되기도 하였다[『세종실록』15년 7월 4일].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군대의 새로운 보병 중심 전술인 절강병법(浙江兵法)을 따르면서 조선후기는 그 이전에 비해 보군의 군사적 중요성이 높아졌다. 따라서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과 같은 주요 군영에서는 보군의 비중이 거의 절대적으로 높았다[『숙종실록』10년 1월 19일]. 어영청과 금위영의 보군은 주로 조총으로 무장한 포수(砲手)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영청과 금위영의 보군에게는 한성으로 번상(番上)하여 근무하는 동안 생계를 위해 호(戶)마다 보인(保人) 3명씩을 지급하였다[『현종개수실록』4년 11월 14일]. 지방군인 속오군의 경우 보군과 함께 마병이 편성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현종실록』7년 11월 6일], 인조대 들어 북방 후금(後金)의 침입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속오군에서 마군이 일부 편성되기도 하였다[『인조실록』3년 1월 9일].
② 임진왜란 중 명나라 군대를 통해 도입된 새로운 보병 중심 전술인 절강병법을 국내에도 보급하기 위해 1593년(선조 26) 훈련도감을 창설하였다. 훈련도감은 최초에는 포수, 살수만으로 편성하였으나 이듬해 6월에는 활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수(射手)를 편입시켜 삼수병(三手兵) 체제를 갖추었다[『선조실록』27년 6월 27일]. 또한 인조대 들어 훈련도감에 마병도 편성되면서 포수 등 삼수병을 마병과 구분하여 보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현종개수실록』4년 11월 14일].
[담당 직무]
① 조선전기 보군은 주로 진을 펼칠 때 진의 가장 앞 열에서 방패를 세워 그 뒤에 있는 궁시나 화기를 이용하는 병사를 적의 기병으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적군이 약화되면 진내에 있는 기병들이 적군을 추격하여 격멸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산악 지형과 같이 기병이 운용되기 어려운 지형에서는 보군이 주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17년 6월 16일].
조선후기에는 어영청과 금위영 등 군영과 전국의 감·병영 등에서 보군은 소규모 단병기로 무장한 살수를 제외하고 주로 조총으로 무장한 포수로 편성되어 조총 사격으로 적군을 공격하는 일을 맡았다[『숙종실록』10년 1월 19일].
② 훈련도감 보군의 전투 양상은 조선후기의 병서인 『병학지남(兵學指南)』, 『병학통(兵學通)』 등에 잘 남아 있다. 전투 시 적군이 100보(步) 이내로 들어오면 포수에 의해 연속적인 조총 사격을 실시하면서 이어 적군이 더욱 접근하면 사수들이 궁시를 계속 발사하여 조총 사격의 간격을 없애고 적군의 돌진을 막았다. 조총과 궁시의 사격에도 불구하고 적군이 계속 진의 앞에 닥치게 되면 바로 뒤에 있는 살수들이 앞으로 달려 나가 적군과 근접전을 벌여 적군을 공격하였다. 훈련도감의 살수들은 절강병법의 원앙대(鴛鴦隊)에 의해 방패(防牌), 낭선(狼筅), 장창(長槍), 당파(鎲鈀) 등으로 무장하여 적군을 공격하였다. 적군이 약화되면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병이 좌우에서 달려 나가 약화된 적군을 포위하거나 추격하여 적군을 격멸하였다.
전투 이외에도 훈련도감은 한성의 중심적 군영으로서 한성의 방어 임무를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점차 궁궐 담 밖과 도성 내외의 순라(巡邏)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1628년(인조 6)부터 훈련도감 군병의 궁궐 담 밖 순라가 정례화되어 3경(更)에 광지영(廣智營)의 초관(哨官)이 입직하는 군졸 20명을 거느리고 궁궐 담 밖을 2회 순찰하기도 하였다. 평시에 훈련도감 군은 한성에 있는 훈련도감의 여러 영(營)에 입직하며 변란에 대비하였다.『만기요람』에 의하면 보군의 경우 금호문(金虎門)에 100명, 홍화문(弘化門)에 15명, 집현문(集賢門)에 15명, 광지영에 50명, 신영(新營)에 20명, 하도감(下都監)에 30명 등이 평소에 입직하였다. 왕이 경희궁에 거처할 때에는 서영(西營)에 50명, 북영(北營)에 20명 등이 입직하였다.
왕이 행행(行幸)할 때에는 보통 훈련도감 보군은 마병에 이어 선두에서 행렬을 호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는 행행하기 전 복병(伏兵)으로서 도성 부근과 내외에 배치되어 왕을 경호하기도 하였는데, 『어영청거동등록(御營廳擧動謄錄)』에 의하면 어영군 및 훈련도감 군병이 제기삼거리, 동관왕묘(東關王廟) 삼거리 등 11곳의 복병 처에 배치되었다. 구체적으로 110명의 훈련도감 포수들이 각 처마다 10명씩 다른 군병, 예를 들어 군관 1원, 마병 3명, 어영군 5명 등과 함께 배치되었다. 이 외에도 도성의 9문(門), 즉 남대문·서소문·신문·창의문·북청문·동소문·동대문·수구문·남소문에 파수장 1명의 지휘하에 각각 어영군 5명, 금위군 5명과 함께 훈련도감의 포수 10명이 조를 이루어 근무하였다.
[변천]
① 조선초기의 보군은 세조대 대부분 보정병(步正兵)으로 통일되었다. 16세기 들어서면서 군역제도의 이완 현상으로 번상하는 기병들은 보군화(步軍化)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번상 보군들은 군사 활동보다는 토목공사 등의 고역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보군이 본인 대신 다른 사람을 군역 담당자로 내세우는 이른바 대립(代立)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로써 보군의 군사적인 의미는 크게 줄어들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전술에 대응하기 위해 보병의 군사적 중요성이 커지자 조선군은 보병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중앙과 지방군 모두 삼수병 체제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패배 이후 기병을 저지하기 위한 조총수인 포병의 중요성이 재인식되면서 보군에서 사수의 비중이 급격히 줄어들고 아울러 살수도 점차 줄어들게 된다. 특히 어영청과 금위영의 경우 보군의 대부분은 포수로 편성되기 시작하였고 이는 각 도의 감영이나 병영의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② 훈련도감은 창설 이후 그 군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군사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였다. 1594년(선조 27) 4월 포수 5초(哨), 살수 4초로 구성되었던 훈련도감의 보군은 11월에는 포수 7초, 살수 4초, 사수 2초 등 13개 초 1,500명으로 증강되었다[『선조실록』27년 11월 19일]. 이후 보군을 중심으로 꾸준히 증가한 훈련도감은 광해군 중반인 1616년(광해군 8)에는 4,000여 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광해군일기』8년 8월 25일]. 이후 인조대 마병이 창설되고 효종대 군액이 증가되어 훈련도감은 약 7,000명에 달하였지만 현종대 이후 군비 감축으로 대체로 5,000여 명으로 고정되었다. 한편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 훈련도감의 사수는 없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1682년(숙종 8) 이후 훈련도감 보군은 포수 20초, 살수 6초로 정착된 이후 특별한 편제상의 변화는 없다. 보군은 천총(千摠)이 지휘하는 좌·우부(左·右部)에 포수 10초, 살수 3초씩 편성되어 있었다. 각 부에는 좌·우·중사(左·右·中司)로 이루어져 있는데 좌·우사에 포수 5개 초씩, 그리고 중사에 살수 3개 초가 편성되어 있다. 각 초의 규모는 시기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숙종 8년경에는 포수 한 초는 113명, 살수 한 초는 11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세기 초 『만기요람』 편찬 당시에는 포수 한 초는 122명, 살수 한 초는 123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여기에는 각각 복마군(卜馬軍) 9명씩이 편성되어 있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대전회통(大典會通)』
■ 『병학지남(兵學指南)』
■ 『병학통(兵學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훈국사례촬요(訓局事例撮要)』
■ 김종수, 『조선 후기 중앙 군제 연구-훈련도감의 설립과 사회변동』, 신서원, 2002.
■ 노영구, 『조선 후기 병서와 전법의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 이태진, 『조선 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 이왕무, 「조선 후기 국왕의 행행시 궁궐의 숙위와 유도군 연구」, 『군사』62,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