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효종대 북벌을 추진하면서 조총 보병인 포수(砲手)를 중심으로 편성된 어영청(御營廳)을 강화하기 위해 적정 규모의 기병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1657년(효종 8)부터 황해도 각 고을에서 군보(軍保) 및 양정(良丁) 중에서 무예가 있는 자를 뽑아 인원을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4월 약 300명의 군사를 확보하여 별마대를 창설하고 이들을 14번(番)으로 나누어 번상(番上) 근무하도록 하였다[『현종개수실록』4년 11월 14일]. 번상 근무할 때 이들은 어영청 기사장(騎士將)의 지휘를 받았다.
[담당 직무]
별마대는 번상하여 어영청에 입직하거나 궁성 숙위를 담당하였다. 왕의 지방 행행(行幸) 시에는 행렬의 앞뒤에서 호위를 담당하였다[『현종개수실록』7년 3월 26일]. 새로 번상하는 별마대와 보군 등이 도착하면 함께 진법 훈련을 행하였으며, 번상 근무 중 시사(試射)에 참가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는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기도 하였다.
[변천]
창설 이후 별마대는 꾸준히 증원되어 750명에 달하였고 매번 1초(哨)씩 약 50여 명이 1정(正) 4영(領) 체제로 1개월을 기한으로 번상하였다. 즉, 15개월에 한 번씩 1개월간 번상해야 했는데 이는 군사들에게 부담이 되었다. 특히 숙종대 후반 황해도의 감영과 병영에 별무사(別武士)가 창설되면서 별마대 군사들이 별무사로 옮겨가자 숙위할 기병은 더욱 부족해졌다. 부득이 각 고을에서 보군(步軍)으로 번상하는 별마대 군사를 충원하는 문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별마대의 번상 폐지와 감영·병영으로 옮겨 소속시킬 것을 주장하는 의견이 영조대에 자주 나타났다[『영조실록』8년 윤5월 4일]. 이에 1746년(영조 22) 별마대를 숙위기사(宿衛騎士) 또는 향기사(鄕騎士)로 개칭하고 그 대우를 높였다. 그러나 폐단이 계속되어 1750년 경기사(京騎士) 150명 3개 번을 설치하고 황해도 향기사의 번상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향기사 700명과 표하군(標下軍) 56명을 모두 황해 병영에 소속시키고 그 자장보(資裝保)에게 일률적으로 쌀과 베를 징수하여 경기사를 유지하는 경비로 삼도록 했다.
별마대는 어영청이 1884년 8월 말 어영청 등 4개의 중앙 군영을 폐지하고 그 병력을 친군(親軍) 4영에 이속시킴으로써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