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영리는 각 지역의 향리 가운데 추천을 받아 「영방선생안(營房先生案)」에 수록한 후 그 중에서 차출하였다.
영리는 전임(前任) 영리와 각 지역의 추천을 거쳐서 「영방선생안」에 수록된 후, 통인(通引)이 되어 글과 초서 등을 익히고, 이어서 공방(工房) 영리, 예방(禮房) 영리 등을 거쳐 이방(吏房) 영리가 되는 것이 최고 출세 코스였다.
[조직 및 역할]
영리의 직임과 인원수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영남 감영의 사례를 보면, 지방의 향리 직임과 마찬가지로 6방으로 분방되어 있다. 영리의 정원은 이방(吏房) 1명, 호방(戶房) 2명, 예방(禮房) 1명, 병방(兵房) 1명, 형방(刑房) 2명, 공방(工房) 1명, 계서(啓書) 4명, 통인(通引) 1명 등 대략 13명 정도였다. 각 고을의 향리 조직과 다른 특별한 직임이 있다면 그것은 계서영리가 있는 것인데, 계서영리는 그 명칭으로 보아 각 영의 장계(狀啓)를 쓰는 영리로 짐작이 된다.
영리직은 대개 호적 정리, 흉년 진휼(賑恤), 검전경차관(檢田敬差官)의 보조, 암행어사 수행(隨行) 등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계서영리는 영리 중에서도 글씨를 잘 써서, 정조대에는 『어정오경백편(御定五經百篇)』을 베껴 쓰게 하고 잘 쓴 순서대로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정조실록』 20년 9월 3일].
[변천]
영리의 특권과 병행하여 조선후기 이후에는 감영 영리를 특정 지역의 특정 이족(吏族), 특정 가계가 독점 안배하는 추세가 생겼다. 이에 상응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배타적인 통혼권이 형성되고 이에 따라 감영 영리들은 혈연적으로 더욱 밀접한 관계 속에 놓이고 감영의 영방 운영은 더욱 혈연적 결속을 기반으로 운영되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