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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 사회에서는 전란의 피해가 복구되면서 그 성과를 국가적 차원에서 흡수하고 대민 통제를 강화하여 지방 통치의 효율을 높이려는 논의들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효종, 현종대를 걸쳐 꾸준히 진행되었던 이러한 논의들은 숙종 초에 오가작통제(吾家作統制)와 지패제(紙牌制)의 실시로 현실화되었다. 숙종대 구체화된 정책들은 시행착오와 현실적인 한계 속에서 이후 지방 통치의 한 축이 되었다. 국가는 면과 리의 하부 조직으로 오가통을 설정하고, 설치와 폐지를 거듭해온 지패제를 실시하여 대민 지배를 강화하였다. 숙종 때 16세 이상의 남정은 거주지, 역, 성명을 기록한 지패(紙牌)를 만들어 리의 책임자인 이임(里任), 해당 관을 거쳐 확인을 받은 뒤 항상 주머니에 차고 다니도록 하였다. 전대의 호패 시행 논의가 지패로 변용되어 일정하게 수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숙종 때 끊임없이 지속되다가 1685년(숙종 11)에 다시 호패제가 복설되어, 지패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전기 이래 민의 유리를 막아 군정 확보와 호구의 증가를 꾀하고 신분 구분을 명확히 하려는 의도로 호패제가 여러 차례 실시되었다. 하지만 호패제의 실시에도 민의 유리는 계속되었고, 양민이 권세가의 노비로 투탁하는 등 피역 저항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법의 운용을 더욱 엄격하게 하였으나, 형벌 시행만 늘어나 오히려 민의 소요를 부추길 뿐이었다.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호패제는 폐지되었다. 조선후기에도 군적 정리와 관련하여 광해군대와 인조대에 호패 시행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폐단에 대한 우려와 민심 안정을 내세운 반대론이 만만치 않았고, 실제 시행도 부진하여 몇 차례 연기되는 등 혼란을 겪다가 결국은 모두 혁파되었다.
이후 효종, 현종대에도 지방 통제책으로 오가통과 향약, 호패 실시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인 끝에 1675년(숙종 1)에 지패와 향약의 조목을 결합시킨 오가통제가 실시되었다. 여기에서 지패가 오가통사목에 포함된 것은 다양한 논의가 일정하게 수렴된 것이지만 오가통의 성과를 제고시키기 위한 좀 더 구속력을 가진 강제적인 조치가 필요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호패를 바로 시행하지 않고 지패로 대체한 것은 역대 호패법의 실패를 고려하여 민의 반발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지패는 민의 입장에서 호패보다 만들기 쉽고 비용이 적게 들며, 주머니에 감추어져 신분이 바로 노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편리하였다. 숙종 즉위 초, 호패 시행에 따른 반발에 부담을 느낀 집권층이 다소 구속력은 떨어지지만 오가통제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실시한 것이 지패였다고 할 수 있다. 지패를 차지 않는 자는 엄격한 제재를 가하였고, 승려들에게도 지패를 발급하여 민의 피역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지패는 시행 반년 만에 다시 논란을 겪게 되었다. 지패가 주머니에 숨겨져 패용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워 실효가 없다는 이유와, 신분 구분을 명확히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호패로 전환하자는 논쟁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민심 안정을 고려한 윤휴와 대민 통제의 효과를 높이려는 허적 등이 일관된 견해를 도출하지 못하며, 호패 시행에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지패는 유실자(遺失者)에 대한 처벌 규정을 개정하는 등 계속 유지되어 나갔다. 특히 지패가 인구수 파악과 송사 판결에 유익한 제도라는 점에는 대부분 인식을 같이하였고, 오가통과 지패가 있어야만 호적이 착실해질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지패는 이후 호패와 더불어 몇 년간 통용되다가 1685년에 다시 지패를 호패로 교체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일률적인 호패의 시행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모든 남정에게 호패를 차게 한 이후에도 지패는 상당 기간 병행되었다. 지패가 자취를 감추고 호패가 일반화된 시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으나 숙종대 후반에는 죄인이나 승려를 단속하는 데 호패가 이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는 이미 호패가 통용된 것으로 보인다[『숙종실록』 38년 10월 28일].
[형태]
지패의 기재 양식은 첫 줄에 통수를 기록하고 다음에 자신의 호와 역 등을 기록하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통수의 대부분이 상천(常賤)인 관계로 사대부들이 그 아래에 들어가 혼란이 생겨서, 서울의 관직자부터 먼저 호패를 차는 방안이 강구되기도 하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숙종 때에 현종과 그의 비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崇陵)이 무너지자 대사헌 이무(李袤)는 상소를 올리며 지패 등으로 백성들이 원망함이 커서 이와 같이 큰 사고가 벌어졌음을 피력하고 있다[『숙종실록』 3년 3월 8일]. 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천재지변을 두고 그 원인 중의 하나로 지패의 시행을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백성들 사이에 지패에 대한 불만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