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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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도어사(調度御史)

서지사항
항목명조도어사(調度御史)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조도관(調度官), 조도사(調度使)
관련어별어사(別御使), 영건(營建)
분야정치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임진왜란 이후 어려워진 국가 재정을 원활히 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직.

[개설]
광해군은 조선의 역대 임금 가운데 유례가 없을 만큼 궁궐 등 왕실과 관련된 건축물을 새로 짓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광해군이 그처럼 궁궐 건축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를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광해군이 후궁의 소생으로 장자인 임해군을 제치고 세자로 책봉되었고, 둘째, 세자 시절 장자인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명나라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셋째, 선조가 죽기 2년 전에 계비인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탄생하면서 명분의 한계성이 뚜렷해졌는데, 이러한 것들이 그를 운수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넷째, 임진왜란 당시 부왕 선조의 권위가 실추되는 것을 보고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왕권의 위상을 높이려는 욕구가 강했다.

1617년(광해군 9) 5월에 궁궐 역사를 전담하는 기구로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했다. 영건도감은 건축을 위한 재원 조달, 인력 동원 등 공사 전반의 실무를 전담하였으며, 조정 중신들이 주축이 되었다. 그러나 건설에 돌입하자 물자와 인력 수급에 문제가 생겼으며, 궁극적으로는 재원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재원은 일단 민간의 토지에서 쌀이나 포목을 거둬 충당했다. 공사 초기에는 한 달에 쌀 2천여 석, 포목 1만 필 정도였으나 1618년(광해군 10)경에 이르면 쌀 5천여 석, 포목 2만 필 정도로 급증했다. 뿐만 아니라 건설 부지 부근에 위치한 민가나 사대부가의 철거와 보상 문제, 강원도나 변산(邊山) 등의 산림 지역으로부터 목재를 벌목하여 수송하는 문제,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는 채색용 도료 등을 명에서 수입해오는 문제 등이 양산되었다. 더구나 이때 명나라는 후금을 치는 데 필요한 원병을 요청해왔다.

재정 문제 때문에 궁궐 건축에 대한 시비가 제기되자 광해군은 새로운 조처들을 강구했다. 농민뿐 아니라 문무 관리에게서도 포목을 징수했다. 나아가 금이나 은을 바치는 하층민들에게 대가를 받고 공명첩을 나눠주고 실직에 준하는 대우를 약속하는가 하면 죄수들에게서도 속죄은(贖罪銀)의 명목으로 은을 거둬들였다. 나중에는 은 이외에 비단, 소금, 철, 심지어 목재나 석재를 바치는 백성들에게도 벼슬을 팔았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재정 확보가 어려워지자 자재의 수급과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왕명으로 특별 어사들을 지방에 파견했는데 이들이 조도어사(調度御史)이다. 이들은 조도관(調度官) 혹은 조도사(調度使)라고도 불렸다.

[담당 직무]
조도어사는 광해군대 궁궐 건축 사업으로 재원이 필요하자 전국 각지에서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한 특별 어사들이다. 궁궐 건설에 부정적 시각을 드러낸 일부 지방관들의 비협조 때문에 재정 확보에 어려움이 생기자 조도어사들이 파견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지방에서 자행하는 횡포가 문제가 되었다. 조도어사 가운데는 서얼이나 천인 출신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지방에 내려가 어명을 내세워 마구잡이로 세금을 징수하는가 하면 그에 반발하는 지방 수령이나 사족들과 마찰을 빚었다. 1619년(광해군 11), 결국 명에 원정군을 파견하면서 궁궐 건축은 기로에 서게 되었다. 원정군에게 필요한 군량과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또 다른 조도어사가 삼남에 파견되었다. 이러한 실정에 하층 농민들의 고통은 배가 되었고, 1620년(광해군 12)에 호남 등지에 심각한 기근마저 발생하자, 재원 조달을 위해 파견된 조도어사 등 측근 관료들 가운데에서도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변천]
조도어사가 사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592년(선조 25)이다. 임진왜란 이후 비축되어 있던 양곡이 떨어지자, 곡식을 바치는 사람에게 벼슬을 주거나 면천하여 주는 기준을 만드는 것을 논의하기 시작하였고, 1592년 12월에 경기, 황해도에 양곡을 모집하는 조도어사를 파견하였다. 이후 광해군대에 궁궐 건설과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조도어사가 파견되었고 이 중 일부는 많은 폐단을 일으켰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민생 수습의 일환으로 지방에서 폐단을 일으켰던 조도어사 6명을 처형하였고[『인조실록』 1년 3월 13일], 인조대 이후에는 그 직책이 사라지게 된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한명기, 『광해군』, 역사비평사, 2000.
■ 장지연, 「광해군대 宮闕營建 : 인경궁과 경덕궁의 창건을 중심으로」, 『한국학보』 86, 일지사, 1997.

■ [집필자] 윤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