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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나라에서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죄수들을 석방하거나 감형하는 은전(恩典)을 베푸는 것.
[개설]
조선시대 사면은 중국의 조칙(詔勅)을 받아 반사(頒赦)하거나, 나라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또는 정치적 모반 사건을 진압했을 때나 재해가 심할 경우 민심을 달래기 위해 시행되었다. 다만 강상(綱常) 등의 국가 윤리 관련 범죄, 강도, 절도 등 치안 관련 범죄는 사면 대상에서 제외하여 국가 질서 유지를 강화하였다. 또 죄수의 유배지 도착 여부, 사면 대상 형량 등 시행 상에 있어서의 문제점 등이 보완되면서 사면령은 조선중기에 형식적인 틀을 갖추게 되었고, 그 이후 조선후기까지 큰 변화 없이 기본 틀을 유지해 나갔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사면은 곧 사유(赦宥)이며 사면령, 즉 사령(赦令)을 내리는 것을 반사(頒赦)라고 한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이를 축하하기 위해 사면을 시행하였고, 반대로 재해나 정치적 모반 사건 등이 일어났을 경우에도 민심을 달래는 차원에서 역시 사면이 이루어졌다. 사면령이 내려지는 주된 계기 중의 하나는 중국 황제의 조칙(詔勅)과 고명(誥命)을 받을 때이다. 중국에서 여러 이유로 대사(大赦)를 내리고, 그 내용을 담은 조서나 칙서를 사신이 가지고 오면 조선에서도 이를 받아 반사하여 죄인을 석방하는 사면을 시행하였다. 그런데 조칙 중에 사면하였다는 내용이 없는데도 의례적으로 조선에서 반사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1724년(경종 4)에는 조칙에 사면령이 담겨있을 경우에만 반사하도록 하였다[『경종실록』 4년 3월 15일]. 중국의 조칙을 받아 반사하는 이러한 사면은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모습을 보인다.
사면령이 내려지는 또 하나 중요한 계기는 나라, 왕실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경우이다. 왕이 즉위하거나 세자가 탄생했을 때, 세자빈을 맞이하는 납빈(納嬪) 같은 혼례나 생일, 주갑탄일(周甲誕日) 등의 날에 이를 축하하는 사면령이 내려졌다. 세자가 입학례나 관례를 치르면 이를 기념하면서[『숙종실록』 21년 4월 19일], 왕을 비롯한 왕실 가족이 병이 위중하거나 병이 낫기를 바랄 때, 혹은 병이 나으면 사면이 시행되었다. 종묘에서 가을에 드리는 큰 제사인 추향대제(秋享大祭)를 드릴 때, 3년상이 끝난 뒤 그 신주를 사당에 모시는 부묘제(祔廟祭)를 시행할 때, 왕이 직접 농사짓는 시범을 보이는 친경(親耕)을 하거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선농단에 제사지낼 때도 사면령을 내렸다.
한편 판결에 대해 꽹과리를 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擊錚)이 있거나 글이 올라오면, 관련 죄인을 왕의 특별 명으로 방면하기도 했고, 역적의 반란이나 사학(邪學)의 죄인 등을 진압했을 때나, 궁궐 내에서 환관, 나인 등의 죄를 다스리고 처형하는 등의 사건이 있고 나면 은혜를 베풀어 민의 마음을 위로한다는 차원에서 역시 사면령을 내렸다[『세조실록』 11년 9월 5일]. 천둥이나 벼락, 가뭄 등 재변이 일어났을 때도 사면을 시행하였으나, 이 경우는 주로 죄인에 대해 판결을 너그럽게 하는 소결의 형식을 띠었다. 자연재해를 인사(人事)에 대한 하늘의 반응, 견책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형벌의 운영이 논의되었고, 사면·석방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국가의 경사나 제사·토역·재난 등의 사안에 따라 내려진 사면령은 시기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정해진 범위는 있었다.
죄인의 석방이라는 점에서 사면은 유교적 예치 이념의 상징인 공옥(空獄), 즉 텅 빈 감옥을 만들기 위해서도, 당시 감옥의 열악한 상황 때문에서도 필요한 제도였다. 조선후기의 환국, 모반 등 극심한 정치적 변동으로 이에 관련된 죄인들이 양산되었으며, 사회의 분화와 다양화 속에 크고 작은 경제범 등 서민 범죄 역시 증가되었으나 감옥이 증설되지 않는 조건하에서는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공옥과 공옥을 위한 사면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조처였다.
[내용]
조선시대 사면은 국가의 경사, 재해 등 여러 가지 계기를 통해 형벌을 소멸시키거나 감해주는 것을 말한다. 삼권분립이 되어 있지 않은 조선시대에 사면은 왕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제도였다. 그러나 실제 시행상에 있어서 국왕이 단독으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즉 사면 횟수나 적절성 여부를 놓고 신하들의 견제가 적지 않았으며 왕과 신하들은 각자의 이념과 이해관계에 서서 사면 시행을 놓고 줄다리기를 했다. 즉 왕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고 조절하는 신하들의 정치 논리가 맞부딪히는 장이 되기도 했다.
조선후기에 있어서 정치범, 즉 당론에 의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된 죄인을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이용되었던 사면은 왕의 은사라는 성격이 강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전근대 조선에 있어 법제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왕과 신하들의 정치권력이 적절히 조정되고 합의를 보는 공치(共治)의 도구였다고 할 수 있다.
[변천]
사면령을 담은 사문(赦文)은 조선초부터 기본 틀을 갖추어 갔다. 태조의 즉위 교서에서 밝힌 사면의 범위는 ‘이죄(二罪) 이하의 죄’였다. 구체적인 죄목은 서술하지 않고 통틀어 유배 이하의 죄라는 형벌 범위만 명시하였으며, 사면 제외 대상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그러다가 세종이 즉위하면서 내린 사면령에서부터 사면시킬 수 없는 죄목이 정해지기 시작했다.
모반·대역을 비롯하여 강도에 이르기까지 사면에서 제외시켜야 하는 죄목을 명시하고, 이 외에는 범죄가 이미 성립했건 미수에 그쳤건, 그리고 형의 확정 여부에 관계없이 모두 사면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기본 사면 문구가 마련된 후에 몇 가지 조항이 시대를 거치면서 차례로 추가·정비되어 선조대에 정리되었다. 이러한 사문의 틀은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세종대의 사문에 비해 조선중기에 이르러 정리된 사문에서 달라진 점은 우선 사면에서 제외되는 범죄의 죄목이 증가되고 보다 구체화되었다는 점이다. 즉 모반(謀叛), 음모를 꾸며 죽이려 한 모살(謀殺), 국가 강상에 관계된 경우 및 관리의 뇌물 수수·절도, 그리고 죄수가 유배지에 도착했는지의 여부에 관한 내용이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