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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송현궁은 인조의 잠저, 즉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1755년(영조 31) 저경궁(儲慶宮)으로 개칭되었다. 선조의 후궁인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사우가 있었다. 현재 한국은행 자리가 이에 해당된다.
[위치 및 용도]
송현궁은 남대문의 안쪽인 서울의 남부 회현방(會賢坊) 내 송현동에 위치하였다. 송현동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과 북창동, 남대문 일대에 해당되는데, 송현궁이 있던 곳은 현재의 한국은행 자리로 알려진다. 송현궁은 선조와 후궁 인빈김씨의 소생인 추존왕 원종(元宗)과 그의 아들인 인조가 생활하던 곳이었다.
[변천 및 현황]
1752년(영조 28) 국왕은 송현궁을 둘러보고는 보수를 지시하였고[『영조실록』 28년 7월 26일] 관리를 위해 호조(戶曹)의 낭관(郎官)이 3년마다 살피도록 지시하였다[『영조실록』 28년 10월 2일]. 1755년(영조 31)에 저경궁으로 개칭하고, 인빈김씨의 사당을 설치하여 신위를 봉안하였다[『영조실록』 31년 6월 2일]. 동시에 인빈에게 경혜(敬惠)라는 시호를 내리고, 원호(園號)는 순강원(順康園)이라 하였다. 영조가 어필로 신주를 써 춘분과 추분, 하지와 동지 그리고 각종 절일(節日)마다 제사를 거행했다.
저경궁은 이후 1908년(융희 2) 인빈김씨의 신위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긴 뒤에도[『순종실록』1년 7월 23일] 건물은 존재하였으나, 1927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가 건립되면서 철거되었다.
[형태]
송현궁 및 이후에 개칭된 저경궁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현재로써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같은 후궁의 궁묘인 육상궁의 모습을 통해서 추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육상궁은 입구에 하마비(下馬碑)가 설치되었고, 입구는 삼문(三門) 형식의 솟을대문이다. 궁 안에는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 이외에 제향과 관련된 전사청(典祀廳)과 헌관집사청(獻官執事廳), 찬알청(贊謁廳), 수복방(守僕房) 등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 육상궁의 이 같은 모습은 송현궁의 형태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52년(영조 28) 12월 영조는 송현궁에 행차해서는 자신의 육순을 기념하여 신하들이 하례를 올리는 것을 사양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차마 듣지 못할 하교[不忍聞之敎]”를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선위(禪位)를 하겠다는 하교를 말하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하교를 접한 신하들은 당황해하였으며 예조(禮曹) 판서(判書) 원경하(元景夏)는 사모(紗帽)를 벗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어가를 돌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계속 고집을 피우자 우의정(右議政) 김상로(金尙魯) 등이 대왕대비인 인원왕후(仁元王后)에게 요청하여 이를 돌리려 하였고, 대리청정하던 세자에게도 청하였다. 다급해진 세자는 호위도 갖추지 않고 보련(步輦)을 타고 가겠다고 지시하였다. 대왕대비의 봉서(封書)가 전달되자, 이를 받아 본 영조는 결국 자신의 의사를 철회하고 궁으로 환궁하였다. 소여(小輿)를 타고 나가던 세자는 국왕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는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국왕을 맞이하여 궁궐 안으로 들어왔다[『영조실록』 28년 1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