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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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로대(淸路隊)

서지사항
항목명청로대(淸路隊)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친위군(親衛軍)
관련어거가(車駕), 대졸(隊卒), 영직(影職), 오위(五衛), 월봉(月俸), 장용위(壯勇衛), 전배(前排), 체아직(遞兒職), 파적위(破敵衛), 팽배(彭排), 행행(行幸)
분야왕실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전기 왕의 행행(行幸) 때 거가(車駕)를 좌우에서 호종하던 병력.

[개설]
1489년(성종 20) 7월 22일에 정해진 규정에 의하면 청로대는 병력 200명을 정원으로 하여 이들을 5번으로 나누어 매 번 40명이 4개월마다 근무하고 교대하게 하였다. 이들에게는 체아직(遞兒職) 수여, 영직(影職) 제수, 월봉(月俸) 지급, 군보(軍保) 지급 등 다양한 혜택이 주어졌는데, 이는 청로대가 왕의 거가를 좌우에서 호종하는 친위군 병력이기 때문이었다. 청로대는 조선전기의 오위(五衛) 체제에 입각한 병력이었기에 조선후기 오위(五衛) 대신 오군영(五軍營) 체제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초기 오위 체제에서 대열(大閱), 강무(講武) 등의 군사훈련 때에는 오위 편제 자체가 왕의 호위 체제가 되나 일반적인 행행 때에는 병조(兵曹) 또는 도총부(都摠府) 이하의 군사업무를 맡은 부대에서 함께 따르는 한편 사복시(司僕寺), 내금위(內禁衛), 별시위(別侍衛) 등의 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금군(禁軍) 그리고 오위의 당번 군사들이 따랐다. 이러한 호위 체제는 성종대에 이르러 오위의 번상제도(番上制度)가 이완되기 시작하고 금군 등도 진장(鎭將), 군관(軍官) 등으로 북쪽 변경지대에의 차출과 파견이 잦아 다소 동요되고 있었다. 이러한 추세에서 거가의 시위가 엄격하지 못하여 의장(儀仗) 병력들끼리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함으로써 새로운 호종 전담 부대의 창설이 요청되었고 그 결과 1484년(성종 15)에 청로대가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최초의 청로대는 출신은 미천하면서도 군사로서의 기능이 우수한 병종(兵種)으로 꼽히던 팽배(彭排), 대졸(隊卒), 파적위(破敵衛) 등 기성 부대에서 건장한 인물 40인을 뽑아 편성하였다[『성종실록』 15년 10월 9일]. 이들은 기왕의 팽배, 대졸, 파적위와는 복장을 달리하였으며 붉은 막대기를 가지고 왕의 거가인 연(輦)의 좌우에서 행군하였다. 하지만 5년 후인 1489년 7월 22일에는 청로대 병력을 충원하는 방식이 기왕의 차출에서 시험을 보아 선발하는 시재(試才) 방식으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차출하다보니 건장한 병력보다는 시정잡배들이 협잡으로 충원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었다[『성종실록』 20년 7월 22일]. 이에 명실상부 건장하고 유능한 병력을 충원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재가 채택되었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청로대 병력은 장용위(壯勇衛)의 예에 따라 240보에서 활을 쏘아 1시(矢) 이상을 맞추고 달리기와 근력 시험에서 합격하는 사람만 충원하기로 하였다.

[조직 및 역할]
1489년 7월 22일에 정해진 규정에 의하면 청로대는 병력 200명을 정원으로 하여 이들을 5번으로 나누어 매 번 40명이 4개월마다 근무하고 교대하게 하였다. 또한 장용위의 체아직 15자리 중에서 정7품 1자리와 정8품 1자리 그리고 정9품 4자리 등 총 6자리를 청로대로 옮기게 하여 청로대 병력의 근무 일수에 따라 서로 교체하여 제수하게 하였다. 그 나머지 체아직을 받지 못하는 병력에게는 예전대로 월별로 급료를 지급하게 하였다. 또한 청로대 병력이 입직하여 근무한 날자가 126일이 되면 품계를 높이되 종5품에서 영직(影職)으로 옮기게 하였는데, 영직은 관직의 직함은 있으나 실무는 없는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마지막으로 청로대 병력들에게는 팽배(彭排)대졸(隊卒)의 예에 따라 1보(保)를 주게 하였다. 이처럼 청로대 병력에게 다양한 혜택을 베푼 이유는 이들이 왕의 거가를 좌우에서 호종하는 친위군 병력이기 때문이었다.

[변천]
조선전기의 중앙 군사조직인 오위 체제 및 금군 조직인 내금위, 겸사복, 오위군은 임진왜란 이후 오군영(五軍營)용호영(龍虎營)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도성 수비 체제, 궁궐 수비 체제는 물론 거가의 호종 체제 역시 크게 바뀌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오군영 체제는 일시에 정비된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및 인조반정,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 대내외적인 상황 변화에 따라 장구한 세월에 걸쳐 정비되었으며 또 수시로 변화되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조선후기에 청로대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전기편』, 육군본부, 1968.
■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후기편』, 육군본부, 1997.
■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의 변천』, 한국연구원, 1985.
■ 차문섭, 『조선시대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 [집필자] 신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