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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평안도 자천에 있는 자모산(慈母山)을 둘러싼 산성으로 고구려 때 평양 일대의 방어를 위해 처음 축성되었다고 한다. 조선전기까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여진족의 침입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 성의 중요성이 재인식되었다[『광해군일기』 14년 1월 5일]. 정묘호란 직후인 1627년(인조 5) 10월 평안도 지역 방어체계 강화를 위해 평안감사 김기종(金起宗)의 건의로 자모산성의 수축이 시작되었다[『인조실록』 5년 10월 6일]. 자모산성은 당시 평안도관찰사 민성휘(閔聖徽)의 책임하에 의주의 백마산성 및 선천의 검산성 등과 함께 축조되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耈)가 이끄는 평안도 군이 이곳을 방어하면서 청군에 대응하기도 하였다. 자모산성은 이후에도 그 군사적 중요성이 인식되어 1669년(현종 10) 무렵 다시 개축하였다. 18세기 후반 들어 자모산성의 관리가 허술해짐에 따라 1779년(정조 3)에는 이 성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평안도관찰사 김종수(金鍾秀)가 건의하여 외성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위치 및 용도]
자모산성은 자산군의 서쪽 20리(약 8㎞) 되는 곳의 자모산에 축조된 산성으로 산세가 매우 높고 험할 뿐만 아니라 밖으로는 한 가닥의 길이 있을 뿐이고 나머지 삼면은 험준하여 방어에 유리한 곳이었다. 아울러 평안도 영변에서 개천–자산을 거쳐 평양으로 내려오는 대로를 제어할 수 있는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따라서 영변을 거쳐 평양으로 남하하는 적군을 저지하기에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평안도관찰사 홍명구의 평안도 감영군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청군의 남하를 견제하였고 청군의 남하 이후 청군 후미를 공격하여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평안도 지역 방어에서 자모산성은 가장 중요한 거점으로 인식되었으나 대로에서 다소 떨어져 있어 대로를 따라 남하하는 적군을 통제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27년 2월 13일].
[변천 및 현황]
17세기 초 후금 세력의 성장으로 인해 이들의 침공 가능성이 높아지자 평안감사 김기종의 건의로 정묘호란 직후인 1627년 축조에 착수하여 후임 평안감사 민성휘에 의해 완공되었다. 자모산성이 축조된 직후인 1633년(인조 11)에는 자모산성의 관리를 강화하기 위하여 자천군의 관아를 자모산성 안으로 옮기는 조치가 이루어졌다[『인조실록』 11년 1월 29일].
1636년 발발한 병자호란 이후에도 자모산성의 군사적인 중요성은 계속 제기되었다. 이에 1669년(현종 10) 평안도관찰사의 책임하에 자모산성의 개축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현종실록』 10년 1월 8일]. 이후 자모산성의 관리가 다소 허술해져 성첩이 무너지고 샘이 매몰되어 폐기되는 등의 문제가 나타났다[『정조실록』 3년 4월 25일]. 이에 따라 평안도관찰사 김종수의 건의로 1779년(정조 3) 자모산성의 서쪽 수문 밖 다소 낮은 지역에 새로이 외성 축조가 이루어졌다. 아울러 방어 군병을 확보하기 위해 평안 병영에 소속된 정초군(精抄軍)을 자모산성에 이속시키는 등의 조치가 강구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3년 4월 25일]. 자모산성에는 별장(別將)이 파견되어 관리하도록 하였고 자산, 성천(成川), 영유(永柔) 세 고을의 군병이 소속되었다.
[형태]
자모산성은 자산군의 서쪽 20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둘레가 12,733자(약 4㎞)이었고 그 높이는 13자(약 4m)에 달하였다. 성의 내부는 평탄하고 99개소의 샘이 있고 군영의 옛터와 군량미를 보관하는 군창(軍倉)이 있었다. 산세가 높고 험하고 한 가닥의 길이 있고 나머지 3면은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새도 넘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방어하기 매우 용이한 형태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홍명구의 평안도 감영군은 사전에 정해진 방어전략에 따라 자모산성에 들어가고 평안병사 유림의 군사는 안주에서 방어에 임하였다. 청군은 이동로에 위치한 각 산성의 주변에 소규모 병력을 잔류시켜 조선군을 견제 고착시키고 주력은 신속히 수도권으로 남하하였다. 홍명구의 평안도 군은 근왕(勤王)의 명령에 따라 자모산성을 나와 기병을 동원하여 청군의 후미를 공격하는 등 남하를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청군 주력 부대의 남하를 막지 못하였다. 이후 홍명구와 유림의 평안도 군은 김화(金化)의 백동 일대에서 후금군과 전투하여 적지 않은 전공을 세웠으나 전쟁의 국면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이 전투에서 홍명구는 후금군의 공격을 저지하다가 전사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풍천유향(風泉遺響)』
■ 『여지도서(輿地圖書)』
■ 유재성, 『병자호란사』,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6.
■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 노영구,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내지 거점방어체계」, 『한국문화』34,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