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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457년(세조 3) 김종직이 중국 초(楚)나라 의제(義帝)를 추모하며 지은 글.
[개설]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조선 세조~성종 때의 유명한 학자이자 관원인 김종직(金宗直)이 26세 때 지은 글로서 제목 그대로 의제를 조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의제는 중국에서 한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패권을 다투던 때 초나라 왕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그는 전국시대 초 왕실의 적통이었지만 진나라에 의해 초나라가 멸망한 뒤 민간에서 양을 기르면서 살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긴 전란이 끝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혼란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진(秦)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했지만 기원전 209년에 붕어하고 이세황제(二世皇帝)가 즉위하면서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반란 세력은 뭉치고 흩어지기를 거듭하면서 유방(劉邦)이 이끄는 한(漢)나라와 항우(項羽)가 지휘하는 초나라의 두 세력으로 정리되었다. 기원전 209년 항량(項梁)은 조카 항우(項羽)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건국한 뒤 민간에서 살던 의제를 찾아내 회왕(懷王)으로 옹립했다.
초나라는 특히 항우의 뛰어난 무용에 힘입어 급속히 세력을 넓혔다. 실권을 잡고 있던 항우는 기원전 208년 항량이 세상을 떠나자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에 올랐다. 이런 변화에 따라 회왕도 의제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의제는 항우보다 유방을 먼저 관중(關中)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함으로써 항우의 큰 분노를 샀다. 결국 의제는 기원전 205년 항우의 지시를 받은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 등에게 암살됨으로써 허울뿐이었던 짧은 영화를 마감했다.
김종직은 1457년 10월 어느 날 의제가 나타난 꿈을 꾼 뒤 이런 역사적 비극을 슬퍼하는 내용을 담아 「조의제문」을 지었다. 이 「조의제문」은 김종직의 사후에 『성종실록』의 편찬과 관련되어 표면화되고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 『성종실록』의 수찬을 위해 실록청 당상관 등이 사초를 검토하였다. 이때 이극돈(李克墩) 등이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제출한 사초 중의 「조의제문」을 두고 "의제에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일을 은밀하되 격렬히 비판했다."고 해석한 후 김종직을 역신으로 규정하면서 무오사화를 일으키고 그의 제자 등 사림파 관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조의제문」은 이처럼 조선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가 발생하는 데 핵심적인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내용 및 특징]
「조의제문」은 무오사화 당시는 물론 그 뒤에도 그 함의(含意)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을 불러왔다. 우선 무오사화가 전개되던 시기의 대신(大臣)인 윤필상(尹弼商) 등은 "「조의제문」은 그 의미가 매우 깊어 ‘충의로 인해 생기는 분한 마음[忠憤]을 부쳤다’는 김일손의 말이 없었다면 세조의 찬탈을 비판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사헌 강구손(姜龜孫)도 "일찍이 그 글을 보았지만 그 뜻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연산군일기』 4년 7월 16일].
김종직의 제자들도 의견이 엇갈렸다. 표연말(表沿沫)은 그 뜻을 해석하지 못했다고 말했으며, 권경유(權景裕)도 김종직은 본래 충의에 불타는 사람이므로 의제를 위해 조문을 지었고 충의가 격렬해 읽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진술했지만 단순히 의제를 추모한 글일 뿐 다른 의도는 없다고 판단했다[『연산군일기』 4년 7월 17일]. 그러나 권오복(權五福)은 「조의제문」이 간곡하고 침통[懇惻沈痛]해 사람들이 말하지 못한 부분을 말했기 때문에 사림(士林)들이 전해 외웠다고 상찬하면서 의제를 노산(魯山) 즉 단종에 비유한 것이 맞다고 인정했다[『연산군일기』4년 7월 19일].
이처럼 「조의제문」은 당시에도 많은 논란을 불러온 글이었다. 권오복을 제외하면 김종직의 제자들도 「조의제문」의 ‘깊은 의미’를 사전에 파악한 사람은 드물었고 재상들도 김일손의 자백이나 유자광(柳子光)의 해설에 힘입어서만 그 진의를 알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은 「조의제문」이 왜곡 또는 확대 해석되었을 가능성을 신중히 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알려 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 글을 지은 김종직이 세조를 거쳐 성종 때까지 지속적으로 조정에 재직하면서 활동했다는 사실 또한 세조의 찬탈을 은밀하되 격렬히 비판했다는 「조의제문」의 내용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그처럼 엄청나게 불온한 내용을 함축한 문서를 문집에 수록해 보급한다는 행위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최근에는 이런 여러 측면을 고려할 때 「조의제문」이 참으로 세조를 비판한 글이었는가 하는 측면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이글의 진의는 이런 여러 사항을 종합적으로 생각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조의제문」은 『조선왕조실록』[『연산군일기』4년 7월 17일] 및 『점필재집』 부록의 사적(事蹟)에 수록되어 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전문]
정축년(1457년, 세조 3) 10월 어느 날 나는 밀성(密城: 현 경상북도 밀양)에서 경산을 거쳐 답계역(踏溪驛: 현 경상북도 성주[星州])에서 잤다. 그때 꿈에 한 신령이 일곱 가지 무늬가 들어간 예복[七章服]을 입은 헌칠한 모습으로 와서 "나는 초 회왕의 손자 심(心)인데, 서초패왕 항우에게 살해되어 침강(郴江)에 빠뜨려졌다."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깨어나서 놀라며 중얼거렸다. "회왕은 중국 남쪽에 있는 초 사람이고 나는 동이(東夷) 사람이니, 거리는 만 리 넘게 떨어져 있고 시간의 선후도 천 년이 넘는다. 그런데도 꿈에 나타났으니 이것은 얼마나 상서로운 일인가. 또 역사를 상고해 보면 강에 빠트렸다는 말은 없는데, 혹시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침내 글을 지어 조문했다.
하늘이 만물의 법칙을 마련해 사람에게 주었으니, 누가 하늘·땅·도(道)·왕(王)의 네 가지 큰 근본[四大]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다섯 가지 윤리[五倫]를 높일 줄 모르겠는가. 그 법도가 어찌 중화에는 풍부하지만 동이에는 부족하며,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천 년 뒤의 동이 사람이지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한다.
옛날 진시황이 포학을 자행해 사해가 검붉은 피바다가 되니, 큰 나라나 작은 나라나 모두 그 폭정을 벗어나려고 허둥댈 뿐이었다. 전국시대 여섯 나라의 후손들은 흩어져 도망가 보잘것없는 백성으로 전락했다. 항량은 남쪽 초나라 장군의 후예로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을 뒤이어 대사(大事)를 일으킨 뒤 왕을 구해 세우니, 백성의 소망에 부응하고 진시황에 의해 끊어졌던 나라의 제사를 다시 보존했다.
그의 도움에 힘입어 회왕은 하늘이 내려준 제왕의 상징을 쥐고 왕위에 오르니, 천하에 진실로 미씨(羋氏: 초 왕족의 성씨)보다 높은 사람이 없었다. 회왕은 항우 대신 유방을 관중(關中)에 들여보냈으니 그 인의(仁義)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회왕은 항우가 상장군(上將軍) 송의(宋義)를 멋대로 죽였는데도 어째서 그를 잡아다가 처형하지 않았는가. 아, 형세가 그렇게 할 수 없었으니 회왕에게는 더욱 두려운 일이었다. 끝내 배신한 항우에게 시해를 당했으니 하늘의 운세가 크게 어그러졌다.
침강의 산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았지만 햇빛은 어둑어둑 저물어가고, 침강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지만 넘실넘실 되돌아오지 않는다. 하늘과 땅이 끝이 없듯 한(恨)도 어찌 다하리오. 회왕의 혼은 지금까지도 떠돌아다니는구나.
내 충성된 마음은 쇠와 돌도 뚫을 만큼 굳세기에 회왕이 지금 홀연히 내 꿈에 나타났다. 주자(朱子)의 원숙한 필법을 따라 떨리는 마음을 공손히 가라앉히며 술잔 들어 땅에 부으며 제사하노니,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향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