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위치 및 용도]
황해도 해주시 북쪽 수양산에 있으며, 3면이 깎아지른 절벽인 데다 남쪽의 한 면은 평평한 듯하여 군사 수백 명이 주둔할 수 있었다. 해주의 성과도 가까워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와 같은 지세로 인해 임진왜란 당시에 수양산성은 왜적들로부터 강도를 지키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수양산성은 무너진 곳이 하나도 없었고, 관사와 창고, 보관하던 무기 등이 모두 온전하였다. 황해도 내에서 형세가 험하기로는 제일인 이곳은 강도를 지키기에 최적지였다.
[변천 및 현황]
1596년(선조 29) 3월 보수했다. 1778년(정조 2) 1월 당시 수양산성 내의 전결(田結)이 76부(負)였다[『정조실록』 2년 1월 10일].
[형태]
성안에 있는 은적사(隱迹寺)는 수백 명의 승려를 수용할 수 있을 만한 규모였다고 하여 당시 성의 규모를 가늠하게 한다[『선조실록』 38년 2월 23일].
[관련사건 및 일화]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