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안원보는 함길도(현 함경도) 경원부 소속 안원에 설치한 보로, 변방 경계에 중요한 지역이었다. 특히 함길도의 아산보(阿山堡)·건원보(乾元堡) 등과 더불어 방어가 쉽지 않은 곳으로 꼽혔다. 각 진에 속한 무관으로 종9품직이던 권관(權管)이 설치되어 있다가 1883년(고종 20)에 종4품의 무관직인 만호(萬戶)를 설치하여 보의 격을 높였다[『고종실록』 20년 11월 23일].
[위치 및 용도]
경원부에서 40여 리(약 16㎞)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경원부 내의 또 다른 보인 훈융보(訓戎堡)와는 60리(약 24㎞) 정도 떨어져 있었다. 접경을 함부로 넘어와 노략질하는 적을 방어하고자 설치하였다.
[변천 및 현황]
[형태]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석축성이었다. 1488년(성종 19) 당시 성의 높이가 8자(약 2.4m), 둘레가 1,850자(약 561m)였다[『성종실록』 19년 3월 29일].
[관련사건 및 일화]
1535년(중종 30) 1월 안원보의 성 밑에 사는 야인이 성안에 함부로 들어와 권관 전주남을 포박하고 폭행하였는데, 전주남은 야인에게 소와 말을 주고 풀려났다[『중종실록』 30년 1월 26일]. 1583년(선조 16) 2월에는 야인의 침입으로 경원부와 함께 안원보의 성이 함락되기도 했다. 이때에 안원의 내노(內奴)인 만년장(萬年長)의 아내 춘월(春月)과 온성(穩城)의 보인(保人) 김은석(金銀石)의 아내 금이(今伊)는 적에게 몸을 더럽힐까 두려워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이를 보고받은 조정에서는 그들을 위해 정려문을 세우고, 요역과 토지세 외의 잡부금을 면제해 주라고 명하였다[『선조실록』 16년 8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