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전기 정부차원에서 수리시설을 개량하고 민간의 농업기술을 발굴, 조사하여 토지 생산력과 과세 수취율을 높이려는 노력이 경주되었다. 민간에서 천방(川防), 제언(堤堰)과 같은 수리시설을 설치하고, 해택(海澤)을 조성할 경우 반드시 제언사(堤堰司)에 신청하고 조정에 보고하도록 관찰사로 하여금 검찰하게 하였다[『성종실록』 19년 윤1월 19일]. 성종대에는 아예 제언 경차관을 파견하여 새로 만든 천방과 제언, 해택에 경작할 만한 곳이 있는지를 살피도록 하는 사목이 작성되었다. 16세기부터는 지주전호제의 발달로 민간에서 수리시설을 개발하고 농토를 개간하는 경향이 확대되었다. 이에 천방 인근의 전답뿐 아니라 연해, 하안(河岸) 지역의 언답(堰畓), 해택지(海澤地)까지 개간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내용 및 특징]
『경국대전』을 보면, “해택지는 첫 해는 면세하고 다음해는 절반을 세금으로 거둔다”고 하여 정부차원에서 연안(沿岸) 지역의 개간을 독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 해택지는 조선전기부터 행해졌는데 이 과정에서 절도사가 군인을 동원하여 해택을 조성하고 자신의 사유지화하는 폐단이 나타났으며[『성종실록』 7년 6월 17일], 해택과 언답을 서로 점거하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송사가 발생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0년 11월 12일].
[변천]
조선후기 들어서는 해택지와 같이 새로 일궈 개간한 전답을 왕실궁가와 아문에서 불법적으로 빼앗거나 궁방에 떼주는 절수의 폐단이 야기되었다. 1623년(인조 1)에 사헌부에서는 근래 내수사(內需司)와 여러 궁가(宮家)에서 산림천택을 불법으로 점유하는가 하면 주인이 있는 전지를 공공연히 빼앗는다고 하면서, 시장(柴場)·제언(堤堰)·해택(海澤)·어살[漁箭]에 대한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발급하여 궁가에 떼어주는 절수(折受) 관행을 일체 금단하게 해줄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다[『인조실록』 1년 10월 28일]. 그러나 인조는 선왕대 내려준 절수지를 혁파할 수 없다는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이같이 궁가와 아문에서 산전(山田)과 해택을 입안하여 절수하고 혹은 민간에서 개간한 산전과 해택을 빼앗아 차지하는 폐단이 17세기에 문제시되어 이를 혁파하자는 논의가 조정에서 계속 제기되었다.
1695년(숙종 21) 『을해정식(乙亥定式)』을 제정하여 왕실의 사적 토지소유를 제한하고, 이후 아문의 면세결도 출세 실결로 전환하는 조치가 취해졌으나 국왕의 비호아래 왕실에 지급되는 사적 재원은 19세기까지 일정 수준을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