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수리지(水利志)」에서 바닷가의 소금기가 있는 지역 가운데 둑을 쌓아 밀물을 막고 빗물을 저장하여 소금기를 뺀 뒤에 농사를 지을 수 있게 개간한 논을 언전(堰田)이라 이른다고 하였다. 언전을 제대로 일구기 위해서는 지세(地勢)를 헤아려 도랑을 파고 개천의 물을 끌어들이는 한편 물을 저장하는 못을 만든 뒤에야 소금기가 가시고 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언답을 개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언답을 일구기 위해서는 조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사전에 갈대를 재배하는 등의 수고가 따랐다. 여기에 염분을 제거하기 위해 지리상 하천수를 끌어댈 수 있어야 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언답은 주인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개간만 성공하면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으며, 조세 부담이 묵은 밭[陳田]이나 개간이 안 된 채 버려진 한광지(閑曠地)보다 가벼웠기 때문에 조선후기 왕실궁가뿐 아니라 소농민에 이르기까지 언전의 개간에 대거 참여하였다. 언답은 특히 지세가 완만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 일대에 다수 개간되었다.
[변천]
16세기 들어 직전제가 폐지되어 국가에서 더 이상 왕실과 관료들에게 수조권을 부여하지 않게 되면서 궁방과 양반지주가 토지개간에 참여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유실된 전토를 복구하는 과정에 개간이 보다 활발히 진행되었다. 조선후기 신전 개간은 토지에 부과되는 과중한 세금을 견디지 못하고 지주의 경작지에서 이탈한 소농, 빈농들에 의해 확대되었다.
진전(陳田)의 경우 개간할 때 물력이 많이 들고 수확이 얼마 되지 않아 세금에 충당하기 바쁜 데다가, 한광지의 경우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경작하는 해부터 곧바로 전세를 수취하였기 때문에[隨起收稅] 소농의 경우 진전이나 마을 인근의 한광지를 개간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반면 산중턱에 불을 놓아 만드는 화전(火田)이나 목장지(牧場地), 해안가의 언답은 중앙의 과세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서도 노동력만 들이면 경작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향촌에서 이탈한 유리민들이 새로운 전답 개간에 대거 참여하였다. 왕실궁방과 아문의 경우 이러한 유리민의 노동력을 활용하여 경작지를 넓혀나가는 한편 중앙의 승인을 받아 이미 개간된 토지를 절수지(折受地)로 귀속시켰다. 문제는 농민들이 개간한 언답을 궁방이나 세력 있는 양반가에서 무단으로 절수하여 개간의 이익을 침해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1685년(숙종 11) 숙안공주방(淑安公主房)에서 절수하는 김해의 언답을 간사한 고을민이 무고하여 빼앗아갔다는 이유로 숙종이 직접 비망기를 내려 김해부사의 죄를 묻고 처벌하게 한 일이 있었는데[『숙종실록』11년 8월 21일], 이는 농민이 개간한 언답을 왕실궁가에서 무단으로 절수지로 만들어버린 데 대한 반발이었을 수 있는데도 숙종은 오히려 고을백성에게 토지를 돌려준 김해부사의 죄를 묻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 사관 역시 “미천한 백성들은 궁가(宮家)가 차지해야 하는 것이면 감히 궁가와 더불어 저항하여 서로 다투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군주는 매양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궁가를 치우치게 두둔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대개 사사로움에 마음이 가리기 때문이다”라는 평을 내렸다.
이처럼 조선후기 토지 개간은 자영농을 육성하고 국가 세수를 확충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보다 궁방이나 아문, 세력 있는 양반들의 면세지를 늘리는 한편 개간의 주체인 농민의 이익을 왕실과 아문에서 침해하는 상황을 야기한 것으로 이해된다. 1695년(숙종 21) 『을해정식(乙亥定式)』이 제정된 이후 왕실궁가의 절수 관행이 일정부분 제약을 받게 되지만, 한편으로 이들에게 지급되는 사적 재원은 19세기까지 정부의 비호 아래 일정 수준 이상을 계속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