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조선시대에 중하급의 문무 관원들이 돌아가면서 궁궐에 들어가 왕의 질문에 대답하거나 정사의 잘잘못을 아뢰던 일.
[개설]
윤대는 조선시대에 왕의 일과(日課) 가운데 하나로써 문관 6품 이상과 무관 4품 이상의 관원이 돌아가면서 궁궐에 들어가 왕과 응대하는 일을 말한다. 왕의 질문에 답하기도 하였고, 정사에 대해 논의하기도 하였다. 윤대에 참여하는 인원은 5명을 넘지 않았다.
[내용 및 특징]
윤대는 왕의 일과 가운데 아침에 수행하는 것으로 상참(常參)·시사(視事) 다음에 행하였다. 조계(朝啓)에 참여하지 않은 각사(各司)는 그 아문(衙門)의 차례대로 매일 1명이 궁궐에 가되, 각 사가 조계한 뒤에 입대(入對)하여 일을 아뢰게 하였다. 조계는 조선 후기에는 매월 세 차례 행하였다. 매월 7일에 왕에게 아뢰어 승낙을 받아 11일에 행하고, 17일에 승낙을 받아 21일에 행하였으며, 27일에 승낙 받아 다음 달 1일에 행하였다. 윤대관은 한 번에 다섯 명[관서]을 넘지 않게 제한하였으며 대상자 명단을 왕에게 올리면 왕이 윤대관을 정했다. 윤대관은 대령하라는 왕명에 따라 입시하였는데, 입시할 때는 자신의 관직, 성명, 맡은 업무인 직장(職掌), 평소에 가지고 있는 소감, 이력(履歷) 등을 차례로 왕에게 아뢰었다.
윤대는 평소에 왕을 자주 만날 수 없는 중하급의 문무 관원들이 왕을 만나는 기회가 되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숙종·영조·정조 등은 이를 자주 열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윤대가 강조된 만큼 자주 열리지는 않았고, 정치적이나 행정적인 면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도 못했다.
[변천]
윤대는 1425년(세종 7) 6월에 처음 만들어지면서 동반(東班)은 4품 이상, 서반(西班)은 2품 이상이 매일 참석하는 것으로 정해졌다[『세종실록』7년 6월 23일]. 그러나 다음 달에 참석 대상 관원이 문·무관 모두 4품 이상으로 바뀌었다가[『세종실록』7년 7월 4일] 나중에는 문관은 6품 이상, 무관은 4품 이상으로 고정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이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영조 때에는 매월 세 차례 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