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존경각은 한명회(韓明澮) 등 여러 신하들의 건의를 성종이 받아들여 건립되었다. 장서 구성은 성균관의 교육 내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기본 장서는 사서(四書)·오경(五經)·여러 역사서[諸史]와 성리학 중심의 유가(儒家) 도서이다. 도서는 주로 교서관(校書館) 등에서 인출되는 도서를 분급 받는 방식으로 수집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존경각은 1475년(성종 6) 성균관의 도서를 보관하기 위해 관내에 지은 건물이다. 위치는 명륜당 뒤이다. 성균관의 서책을 보관하여 대사성 이하 학관(學官)과 유생의 열람을 대비하는 것이 그 설치 목적이었다. 그런데 문무과의 강경(講經) 때에 모두 성균관의 서책을 실어 와서 시험을 보다 보니 더러워지고 손상되거나 분실되는 책이 많아졌다. 이에 과거 시험에서 강서(講書)할 때에는 교서관에서 관장하는 문무루(文武樓)의 서책을 가져다 쓰도록 바꾸었다[『연산군일기』 5년 8월 21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책이 없어져 정조 때에 이르면 층층이 있는 서가가 거의 비었다고 한다.
[조직 및 역할]
존경각은 서리(胥吏) 한 사람이 관장하도록 하였다. 장서가 많을 경우에는 수만 권에 이르기도 하였으며, 유생들이 언제든 대출해 갈 수 있었다. 중국의 사신이 오면 기휘(忌諱)할 만 한 서적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다[『선조실록』 15년 11월 1일]. 성균관에서 칠석제(七夕製)를 설행할 때 시험 문제를 보관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20년 7월 7일].
[변천]
1514년(중종 9) 존경각에 불이 나 여러 대에 걸쳐 축적해 온 서책을 다 태워 버렸다. 임진왜란으로 그 후에 수집하여 소장한 장서들이 다시 소실되었으며, 그 대책으로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서 새로 간행하고 있는 책들을 예조에서 행문(行文)하여 각 도에서 두세 질씩 올려 보내도록 하여 성균관에 간직해 두게 하였다[『선조실록』 37년 12월 2일]. 그러나 광해군 때에도 왜란 중에 존경각이 소실된 후 장서를 보관할 독립된 건물이 없기도 하였지만 ‘단지 낡고 더러워진 몇 권의 책이 있을 뿐’ 이라고 하였듯이 사정이 개선되지 않았다[『광해군일기』 13년 3월 18일].
1601년(선조 31) 성균관 중건공사가 시작되어 1606년에 1차로 문묘·명륜당·동재·서재 등이 중건된 데 이어, 1626년(인조 4)에 2차 공사로 존경각이 정록청·양현고·식당 등과 함께 중건되었다. 1790년(정조 14)에는 북한산성에 있는 경서를 각기 2건씩, 운책(韻冊)을 5건씩 인쇄하여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매 권(卷)마다 보장(寶章)을 찍어서 존경각에 보관토록 하였다. 또 존경각 소장 서적들을 성균관 구임전적(久任典籍)이 관리하게 하되, 간수를 잘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곧 ‘나랏돈을 제대로 맡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법률[公貨不謹典守律]’로 논죄하도록 했다[『정조실록』 14년 2월 24일]. 1879년(고종 16)에는 존경각에 도적이 들어 312권의 책자를 분실하는 사건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