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고려·조선시대에 유생이 학교나 과거 시험에서 한문으로 격식에 맞추어 시나 글을 짓는 것.
[개설]
제술은 성균관에서 『경국대전』「예전(禮典)」장권(獎勸)조에 근거하여 시행했던 격식에 맞춘 작시·작문 과제이다. 열흘마다 시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순제(旬製)라고 하며, 평가는 12등급으로 했다. 성균관 기숙사에서 지내는 거관(居館) 유생들뿐만 아니라 문음(門蔭)으로 벼슬하는 생원과 진사, 유학(幼學)이 모두 와서 응시할 수 있었다. 1년을 통산해서 10등급으로 나누고 상위의 5명을 예조(禮曹)에 통보해서 문과의 초시에 응시하게 했다.
[내용 및 특징]
성균관·사학·향교의 학업 평가와 과거의 시험 형식은 크게 고강(考講)과 제술로 나뉜다. 고강은 경서(經書)나 병서(兵書) 등을 어느 정도 외우고 풀이하는지 확인하는 것을 말한다. 『경국대전』에는 “성균관에서는 매일 여러 유생이 읽은 책을 추첨해서 강하게 하고, 열흘마다 문제를 내어 제술 시험을 보여 성적의 차례를 정하여 장부에 기록해 두고, 예조의 당상관은 매월 한 차례씩 고강하여 모두 장부에 기록해 둔다. 그리고 성균관의 일강(日講)과 순과(旬課) 및 예조의 월강(月講)을 통틀어 우등한 자를 아뢰어 보고해서 등용하도록 한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월강과 순제가 비롯되었다.
제술의 평가는 12등급으로 했다. 맨 위에 상상(上上)·상중(上中)·상하(上下), 그다음에 이상(二上)·이중(二中)·이하(二下)와 삼상(三上)·삼중(三中)·삼하(三下), 그리고 차상(次上)·차중(次中)·차하(次下)가 있다. 갱(更)·불(不) 등은 점수가 아예 없는 낙제이다. 대개 삼하 이상이어야 선발 대상으로 인정되었다[『중종실록』 30년 12월 24일].
[변천]
『경국대전』의 규정대로 하면 성균관 유생들은 매일 일강, 매월 월강, 그리고 매월 세 번 상순(上旬), 중순(中旬), 하순(下旬)에 제술을 해야 했다. 그러나 뒤에 일강과 월강은 사실상 행해지지 않았다. 지방 향교에서의 순제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이후 폐지되었다[『인조실록』 13년 7월 13일]. 다만 성균관 순제는 없어지지 않고 횟수를 줄여 실시한 듯하다[『인조실록』 12년 10월 12일]. 영·정조 때 성균관 유생의 생활을 서술한 『반중잡영(泮中雜詠)』에는 제술을 매월 21일 한 번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나마도 ‘생원과 진사들이 재중(齋中)에서 행하는 순제를 모두 하재(下齋)에서 차술(借述)하는데, 만약 힘써 제술하여 등수에 들려는 자가 있으면 비웃는다고 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형식적으로 치러졌던 것 같다[『중종실록』 31년 1월 11일]. 정조 때에 장령 오익환(吳翼煥)의 상소에 ‘한 달 걸러 시험 보는 순제는 대부분 집에 있으면서 지어 올린 것인데도 크게는 혹 외람되이 급분(給分)을 받기도 하고, 작은 경우에는 도기(到記)가 찼다 하여 직부(直赴)를 허가한다.’라고 한 것에서 순제를 두 달에 한 번씩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정조실록』 12년 1월 23일].
매월 21일 한 번만 보는 순제에는 문음으로 벼슬하는 생원과 진사, 유학이 모두 와서 응시했다고 한다. 1년을 통산해서 연말에 10등급으로 나누고 상위의 5명을 예조에 통보해서 문과의 초시에 응시하게 했다. 나중에 그 제도를 고쳐서 매월 부(賦)·표(表)의 시험 제목을 10개씩 내주고 매월 3일에 하나의 제목으로 지어 제출하도록 하였다. 제출하지 못하는 사람은 고강을 받게 하였다. 제목 하나를 짓지 않으면 3점을 깎고, 고강에 참석하지 않으면 15점을 깎았다. 한 달의 점수를 통틀어 우등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