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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비천당은 성균관의 별당인데, 그 명칭은 주자가 말한 ‘비천대유(丕闡大猷)’ 즉 ‘큰 도를 밝힌다’는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비천당은 과거를 시행할 때 그 뜰을 시험 장소로 사용하였다. 시험 장소로 둘을 설치할 때는 예조(禮曹)를 일소(一所), 비천당을 이소(二所)로 삼았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과거 응시자가 폭증하여 비천당만으로 다 수용하지 못하면 담을 허물어서 명륜당(明倫堂)의 안뜰과 통하도록 하였다[『영조실록』 22년 8월 22일].
[설립 경위 및 목적]
1664년(현종 5) 9월에 도성 안에 있던 인수원(仁壽院)·자수원(慈壽院) 등 두 니원(尼院)을 철거하고, 그 재목으로 비천당과 일량재(一兩齋)·벽입재(闢入齋)를 세웠다.
[조직 및 역할]
비천당 중앙에는 정청(正廳)이 있고, 좌우에 협실(夾室)이 있는데 모두 25칸이다. 또 양옆의 재실(齋室)을 일량재·벽입재라 명명하였는데 일량재는 주희(朱熹)가 ‘불사를 폐하고 유궁(儒宮)을 세우는 일이 일거양득이다’라고 말한 데서 따왔다. 벽입재는 정이(程頤)가 ‘이단을 물리쳐야만 성현의 길로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한 말에서 따왔다. 두 재의 이름은 모두 송시열이 명명하였다.
[변천]
1778년(정조 2) 황폐된 학사를 수리할 때까지 사학합제(四學合製)를 비천당에서 치렀다. 벽입재가 화재로 소실되어 1784년(정조 8) 9월에 다시 중건하였으나, 1869년(고종 6) 왕이 비천당을 고쳐 세우라고 한 것을 보면 비천당의 건물 상태도 매우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고쳐 세운 비천당은 한말에 일량재와 함께 파괴되었다가 한국전쟁 때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1946년 9월 이후 한때 잔존한 비천당을 성균관대학교에서 대학 본부로 사용하고, 좌우 협실은 대학도서관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88년 8월 건평 184.4㎡의 규모로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