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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에 성균관과 8도 계수관 향교의 대성전 동쪽에 있는 여러 유현(儒賢)의 위패가 안치된 행각.
[개설]
동무는 성균관이나 향교의 문묘(文廟) 안에 정전인 대성전에 배향하지 못한 유현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대성전 앞 동쪽에 세운 건물이다. 서쪽에 세운 건물은 서무(西廡)라고 한다. 여러 도의 계수관(界首官) 향교에는 동무와 서무가 있었으나, 그 나머지 주(州)·부(府)·군(郡)·현(縣)의 향교에는 모두 무가 없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와 조선시대 문묘에서 정전인 대성전에 모시는 공자와 사성(四聖), 십철(十哲), 송조(宋朝)의 육현(六賢) 외의 선현(先賢)들을 제사지내기 위해 대성전 좌우에 동무와 서무를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했다. 동무에는 역대 중국 성현을 앞쪽에 모시고, 설총(薛聰)·안향(安珦)·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 등 9위를 뒤쪽에 모셨다.
[조직 및 역할]
동무에는 공자의 여러 제자 및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유현 55위의 위패를 모셨다. 초하루와 보름의 분향 때 동무에 수복(守僕) 한 사람이 배치된다. 석전(釋奠) 제사 때는 촛불을 밝히고, 어린아이 주먹만 한 생육(生肉) 한 덩어리와 포(脯) 세 가닥 그리고 잔과 받침 한 개의 간단한 전물(奠物)을 올린다.
[변천]
1461년(세조 7) 상정소(詳定所)의 건의에 의해 문묘의 각 위(位)에 올리는 전물을 모두 탁자를 써서 진설하게 하고 바닥에 자리를 펴는 것은 없애도록 할 때[『세조실록』 7년 2월 3일] 서무와 함께 동무도 이에 따라 진설되었다.
1610년(광해군 2) 9월 4일에는 증(贈) 의정부 우의정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증 의정부 우의정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증 의정부 영의정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증 의정부 영의정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증 의정부 영의정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다섯 유현을 문묘의 동무와 서무에 추가로 배향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9월 5일]. 1756년(영조 32) 2월 15일에는 다시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의 동무와 서무에 배향하였다[『영조실록』 32년 2월 15일].
1791년(정조 15)에는 태학 동무에 봉안한 문정공 송시열(宋時烈)과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위판 순서가 바뀐 것을 발견했다. 앞서 개수를 하고 다시 봉안할 때 제대로 살피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그 일을 담당한 유생은 무기한 과거 응시를 금하는 정거(停擧)의 벌을 받았다[『정조실록』 15년 8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