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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번와소(燔瓦所)는 조선시대 궁궐 건축 및 개수, 축성, 왕릉 조성 등을 위해 세운 임시 관서인 도감(都監) 내에 설치되어 현장에서 기와를 제작하여 공급하던 곳이다. 조선전기 의궤가 남아있지 않아 언제부터 도감에 번와소가 설치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1616년(광해 8)에 영건도감(營建都監)에 설치된 번와소에 관한 『조선왕조실록』 기사이며[『광해군일기』 8년 5월 3일], 의궤 중에서는 17세기 후반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에 번와소에 대한 기록이 나온 후 조선말기까지 지속적으로 설치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은 건국 초부터 궁궐 건축에 필요한 기와를 공급하는 상시 관청인 와서(瓦署)를 운영하였으며 태종대에는 양반들에게 기와를 공급하기 위하여 특별히 별요(別窯)를 설치하였다. 번와소는 나라의 큰 공사가 있을 때 설치되었던 임시 기관인 도감에 설치된 부속 기관인 소(所) 중의 하나였다.
번와소는 기와 제작에 필요한 땔감 등을 조달하였으며, 왕릉 조성 시 봉분 앞에 짓는 정자각(丁字閣)과 재실, 각종 건축물, 원소(園所)의 담장 조성에 필요한 기와를 현지에서 조달했다.
160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총 28종이 남아있는 『산릉도감의궤』의 번와소에 관한 기록을 분석해보면 17세기 이후 번와소에 동원된 와장(瓦匠)의 숫자는 최소 3명에서부터 75명까지였다. 현종 숭릉 공사 당시 75명의 와장이 동원된 이후 최소 3명에서 최대 12명이 소속되어 기와를 제작하다가 1800년(순조 즉위) 정조 건릉(建陵) 조성 때는 39명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번와소에는 대부분 와장만이 소속되어 있었으나 1757년(영조 33)에는 지눌장(績訥匠) 1인이 추가로 구성되기도 하였다. 의궤에는 번와소에서 일을 했던 장인들의 이름을 명기하였는데 17세기 번와소에 차출된 장인들은 신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이는 장인 조직이 집안 내에서 기술을 전수하는 세습적 경향이 강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당시 도감에 설치된 다른 소의 장인 조직들도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1659년(효종 10) 영릉에는 신중남(申仲男), 신중생(申仲生), 1675년(숙종 1) 숭릉에는 신중립(申仲立), 1683년(숙종 9) 인경왕후 익릉(翼陵)에는 신무선(申武善), 신무영(申武英) 등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친인척이나 부자지간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문영식, 『조선후기 산릉도감의궤에 나타난 장인의 조영활동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