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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숙종대까지는 전국을 그린 지도를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영조대 이후에는 정상기(鄭尙驥)가 백리척(百里尺)을 이용해 만든 조선 지도를 지칭.
[개설]
조선전기 동국지도(東國地圖)는 정척(鄭陟)과 양성지(梁誠之)가 1463년에 제작한 지도를 일컫다가 이후 숙종대까지 작가와 상관없이 조선전도(朝鮮全圖)를 그린 지도로 통칭되었다. 그러나 영조대에 백리척을 이용한 정상기의 축척 지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조선후기에는 정상기가 제작한 조선 대전도와 팔도분도를 지칭하게 되었다.
[변천]
정척과 양성지 등이 세조의 명으로 의정부에 모여서 의논한 끝에 조선전도를 확정하여 1463년(세조 9)에 동국지도를 제작해 올렸다[『세조실록』 9년 11월 12일].
1713년(숙종 39) 청나라에서 백두산 정계의 문제로 파견된 칙사가 백두산 지도를 보고 싶어 하자 동국지도를 내보여 백두산 형세를 보여주었다. 당시 비변사에는 매우 상세한 조선전도가 있었음에도 일부러 대략의 지형만을 볼 수 있는 지도를 선택하여 청국 칙사에게 보여주었다[『숙종실록』 39년 6월 2일].
1755년(영조 31) 영조가 병조판서 홍봉한(洪鳳漢)에게 동국지도 한 폭에 조선 팔도가 모두 그려졌다 하니 찾아 들이라 명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동국지도는 조선 팔도의 전도를 그린 지도로 인식된 듯하다.
정상기 일가의 「동국지도」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757년(영조 33) 8월 6일의 일이었다. 수찬 홍양한(洪良漢)이 정항령(鄭恒齡)의 집에 소장된 정상기의 「동국대지도」에 대해 논하며 조선 산천과 도로가 상세히 갖춰졌으며, 백리척으로 재어보니 틀림없이 잘 맞았다고 하였다. 이에 영조가 승지에게 그 지도를 가져오게 하여 직접 살펴본 뒤, 백리척으로 제작한 지도는 처음 본다고 칭찬하며, 홍문관에 한 본을 모사(摸寫)해 들이라 명하였다[『영조실록』 33년 8월 6일].
이후 1757년 8월 9일 홍양한은 정상기의 지도에 대해 산수와 도로 및 고을 등이 매우 상세하여 조리가 있고 법례도 많아 지도 족자 위에 적어 넣었다고 하였다. 이에 영조는 비변사에 한 본을 비치할 것을 명하였다. 또한 홍양한이 백리척을 이용해 제작한 분도팔도첩(分圖八道帖)이 있음을 전하자 친히 열람하고 그 상세함을 칭찬하며 전도를 모사한 전례에 의거하여 모사하여 함께 홍문관에 두고 비변사에도 비치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홍양한이 여도(輿圖) 즉 지도는 실로 국가에서 중요한 바,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지 수백 년이 지나 그 후 연혁을 상고할 것이 없으니 홍문관에서 팔도에 명하여 제작된 읍지(邑誌)의 모사본이나 인쇄본을 가리지 말고 모두 거둬들이고, 읍지가 없다면 수집, 편성(編成)하게 할 것을 제안하자 이를 추진하도록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에 관찬(官撰)된 동국지도와 관련해서는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된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를 통해 당시 동국지도의 면모를 추정해볼 수 있다. 이 지도는 16세기 중반 정척과 양성지가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상중하 삼단의 계회축(契會軸)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지도 상단에 제목이 있고 하단에는 지도 제작에 참여한 이이(李頤) 등 12명의 관등과 성명을 기록한 좌목(座目)이 있다. 팔도의 주현(州縣)과 수영 및 병영이 표시되어 있으며, 만주와 대마도(對馬島)를 우리 영토로 명기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조선초기의 영토 의식을 엿볼 수 있다. 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의 우리나라 부분을 통해 그 면모를 알 수 있는 이회(李薈)의 「팔도지도」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거의 일직선으로 나타나 있었으나 이 지도에는 두만강을 비롯한 북동부 지방이 많이 보완되었다. 조선의 산계와 하계도 자세하고 정확하게 표시하였으며, 각 군현은 도별로 색을 달리하여 경기도는 주황색, 충청도는 황색, 강원도는 연녹색, 황해도는 연백색, 경상도는 적색, 전라도는 백색, 함경도는 청색, 평안도는 녹색으로 표시하고 있다.
한편, 정상기가 제작한 「동국지도」는 조선 팔도를 한 화면에 그린 대전도와 이를 팔도로 나누어 분첩한 팔도분도로 구성되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원도가 후대까지 지속적으로 전사되어 현재까지 다수 보존되고 있다. 대전도는 1 대 50만 정도의 대축척 지도로 여러 종이를 이어 전사해야 하는 불편함과 열람, 휴대상의 문제로 후대까지 활발하게 전사되지 못하였고, 팔도분도 형식의 사본이 주류를 이루었다.
팔도분도는 각 도를 한 장의 지도에 그렸으나, 지면 관계와 도의 크기로 인하여 함경도는 남도와 북도가 각기 1면이 되고, 경기도와 충청도는 합하여 1면으로 되어 있다. 함경북도 도폭의 오른쪽 아래에는 여백을 이용하여 지도를 만들게 된 동기와 범례가 실려 있어, 이전 지도의 한계와 지도 제작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팔도분도는 기존 지도의 부정확한 도리(道里)의 원근과 방위를 정확하게 작성하기 위해 백리척을 사용하여 조선후기 축척 지도의 발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정밀 지도였다. 지도에 ‘백리척’을 그리고 축척의 실제 거리는 100리를 약 9.5㎝로 표시하여 지도상에서 실제 거리를 산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각 도를 이으면 전도(全道)가 되도록 같은 축척에 의하여 그렸다는 점과 평탄한 곳과 지형이 험준한 곳은 축척이 같지 않다는 점을 밝혔다.
각도의 성읍(城邑)은 채색으로 구분하였는데, 경기도는 황색, 충청도는 분홍색, 전라도는 붉은색, 경상도는 보라색, 황해도는 흰색, 평안도는 회색, 함경도는 검은색으로 나타내고 있다. 산계(山系)의 줄기가 뚜렷하게 그려져 있으며, 산은 초록색, 하천은 푸른색으로 구분하였다. 특히 육로와 해로를 자세하게 기입한 수륙의 도로는 붉은선, 좌우도의 경계선은 노랑선, 봉화대는 빨강색, 역보(驛堡)는 푸른색으로 식별하여 한눈에 모든 지리 정보를 볼 수 있게 하였다.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국토의 원형을 사실에 가깝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특히 이 지도는 조선후기 관찬지도 제작은 물론 김정호가 1834년에 제작한 「청구도」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의 기본 자료가 되었으며, 구한말 일제에 의한 근대적 측량 지도가 나오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지도 제작에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