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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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도(天文圖)

서지사항
항목명천문도(天文圖)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신법천문도(新法天文圖),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혼천전도(渾天全圖), 황도남북항성도黃道南北恒星圖), 황도중국합도(黃道中局合圖), 황도총성도(黃道總星圖)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지상에서 관측된 천체의 위치를 석판에 새겨 넣거나 지면에 투영하여 그린 별자리 그림.

[개설]
조선시대 천문도 중에 현존하는 것으로는 1395년(태조 4)에 석각(石刻)으로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이 천문도는 1571년(선조 4)에 목판본으로 제작되었고, 1687년(숙종 13)에 다시 석각으로 복각되었다. 1770년(영조 46)에 이것을 목판으로 인쇄하여 만든 동일한 이름의 천문도가 전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북극을 중심으로 북천(北天)의 별들과 적도 이남의 별이라 하더라도 한양에서 볼 수 있는 별들만 기입되어 있다.

17세기 말 연행한 사절단이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를 만나 서양 천문도를 조선에 들여오게 되면서부터 서양식이 가미된 새로운 천문도가 제작되었다. 17세기 말 이후 천문도에는 남극과 그 주위에 있는 별들도 함께 기입되어 있고,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없는 천구 전면의 별들을 다수 포함하여 새로운 성수(星宿)가 추가되었다. 태조대의 천문도와 서양의 성도(星圖) 형식을 절충한 천문도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1742년(영조 18)에 제작된 법주사 소장의 8곡 병풍식 천문도인 「신법천문도(新法天文圖)」가 있다. 18세기에 제작된 목판본 「혼천전도(渾天全圖)」는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1807년 제작한 「황도중국합도(黃道中局合圖)」, 「황도남북항성도(黃道南北恒星圖)」, 「황도총성도(黃道總星圖)」 등도 있다. 이 밖에도 1861년 남병길이 저술한 『성경(星鏡)』에는 성수(星宿)와 궁별(宮別)로 분리하여 그에 속하는 별들의 위치까지 표시된 성표(星表)를 곁들인 것이 특징이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천문도는 역법 및 천변(天變)이나 성변(星變)과 관련하여 조선왕조의 정책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지도와 더불어서 왕조 권위의 표상이 되기도 하였다.

1433년(세종 15)에 천문과 역법에 관련된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총 4권으로 구성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이 완성되었다. 천문에는 중외(中外)의 관아에 별의 자리를 배열하여 들어가는 별의 북극에 대한 도(度)와 분(分)을 측정하게 하였다. 또한 고금(古今)의 천문도를 상고하여 28수(宿)의 도수(度數)·분수(分數)와 12차서의 별의 도수 일체를 『수시력(授時曆)』에 따라 수정하여 돌에 새긴 뒤 탁본을 떠서 만든 것이다. 한편 역법서로는 『대명력(大明曆)』·『수시력(授時曆)』·『회회력(回回曆)』과 『통궤(通軌)』·『통경(通徑)』 등 여러 책을 참고하고 교정하여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編)』을 편찬하였다[『세종실록』 27년 3월 30일].

천문은 천명과 관계된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천문의 변화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 왕은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1499년(연산군 5)에 혜성이 나타나는 등 천변이 나타나자 연산군은 별이 보이는 곳의 분도와 방위를 자세히 살펴서 보고하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 5년 7월 21일]. 또한 1630년(인조 8) 관상감에서 오경(五更) 즉, 오전 4시의 시각마다 하늘 중심에 떠오르는 성좌를 추산해놓은 것이 천문도 성좌의 도수와 맞지 않는 곳이 있자 관상감에서 옛 천문도와 당시 천문도를 비교하여 일관(日官)에게 1631년부터 다시 추산하여 관측하도록 하였다[『인조실록』 8년 4월 8일]. 1729년(영조 5)에도 영남 지방에 흉년이 들고 혜성이 관측되는 성변이 발생하자 영조가 『천원보력(天元寶曆)』을 열람하여 유성(流星) 그림을 살펴보았다[『영조실록』 5년 5월 10일].

천문에 관한 최신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648년(인조 26)에 동지사(冬至使)의 일관 송인룡(宋仁龍)이 역법을 배우기 위하여 서양인 선교사로 흠천감에 있던 탕약망(湯若望, [Adam Schall])을 만나 성도 10장을 받아 돌아왔다[『인조실록』 27년 2월 5일]. 또한 1742년(영조 18) 관상감에서 동지사행 때 구해 온 천문도와 오층윤도(五層輪圖)를 본떠서 제작하도록 하였다[『영조실록』 18년 11월 20일].

천문도는 신하들에게 배포되기도 하였다. 1571년(선조 4)에는 관상감에서 태조대에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목각한 천문도 120축을 대량으로 제작하여 2품 이상 문신 30명에게 하사하였고, 같은 해 박응남·노수신·유희춘 세 사람에게도 천문도를 하사하였다[『선조실록』 4년 10월 19일], [『선조실록』 4년 11월 3일].

[참고문헌]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 나일성, 「18세기 한국의 천문도 혼천전도」, 『한국우주과학학보』 제4권 2호, 한국우주과학회, 1995.
■ 이용범, 「법주사소장의 신법천문도설에 대하여-在淸天主敎神父를 통한 서양천문학의 조선전래와 그 영향」, 『역사학보』 31, 역사학회, 1966.

■ [집필자] 정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