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초기부터 국조인 태조와 연관된 여러 지역에 태조 어용전(御容殿)을 건립하고 태조의 초상을 봉안하였다. 태조가 태어난 옛 집인 영흥과 고려의 옛 중심지인 평양·경주 등에 전각을 세워 초상을 봉안했으며, 전주에도 경주의 어진(御眞)을 모사하여 봉안하였다. 이들은 당초에 어용전이라고 불렸으나 1412년(태종 12) 이래로 태조진전으로 통칭되었다. 계명전(啓命殿)은 외방의 태조진전 중 가장 마지막에 건립된 곳이다.
[성립 경위]
개성부에 있는 태조의 잠저 때 집터에 태조진전을 건립하는 일은 태종이 계획하였고, 1418년(세종 즉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공사의 진척을 보기 위해 세종이 직접 행차하기도 했다[『세종실록』 즉위년 10월 20일]. 1419년(세종 1) 4월에 진전이 완공되었다. 이곳에는 어진을 봉안하는 진전뿐 아니라 숭효사(崇孝寺)라는 불당과 승사가 부속되어 있었다[『세종실록』 1년 4월 22일]. 1419년 7월에 용흥의 옛 땅에 세운 진전이므로 이곳에서 새로운 왕업을 열었다는 의미를 담아 ‘계명(啓命)’이라고 진전의 명호를 정했다[『세종실록』 1년 7월 12일].
1419년 8월에는 태조 어진을 봉안하는 의절을 마련했다. 이어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로 하여금 태조 어진을 계명전에 옮겨 모시게 하였다. 이때 각 관청에서 시위관 1명씩을 보내어 모화루(慕華樓)까지 배행하게 하였다[『세종실록』 1년 8월 26일].
1420년(세종 2)에 계명전에 왕이 친히 제사 지내는 의절을 마련하였다[『세종실록』 2년 윤1월 28일]. 같은 해 2월 세종은 상왕 태종과 개성부에 행행하여 계명전에 직접 제사를 올렸다[『세종실록』 2년 2월 19일]. 1422년(세종 4)에는 계명전의 이름이 고려 시조 진전의 이름과 같다고 하여 목청전(穆淸殿)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목청전의 제향은 준원전(濬源殿)과 마찬가지로 유명일(有名日)에 사신을 보내어 지내도록 정했다. 정기적인 제향을 통해 태조의 창업을 기억했을 뿐 아니라, 세종·세조·성종·중종 등 여러 왕이 개성에 행행할 때에는 목청전에 직접 들러 제향을 올리고 국초의 일을 되새겼다.
[변천]
임진왜란 때 목청전이 전소되었고, 그 안에 봉안되었던 태조 어진도 소실되었다. 광해군대에 영숭전(永崇殿)과 봉선전(奉先殿) 등의 진전을 재건하였으나 목청전의 재건은 시행되지 못하였고 이후 조선후기 내내 목청전은 그 터만 보전되었다.
1899년(광무 3) 고종은 태조를 새로운 황제국의 시조로 추숭하는 일련의 의례를 시행하였다. 우선 태조와 장종·정종·순조·익종을 황제로 추봉하는 의례를 거행했고, 원구단에서 태조 고황제를 하늘에 배향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또 선원전(璿源殿) 제1실에 태조 어진을 봉안하기로 하고, 준원전의 태조 어진을 옮겨와 본떠서 그린 후 봉안하였다[『고종실록』 37년 5월 22일]. 몇 달 후 선원전 화재로 불탄 어진들을 다시 본떠서 그리고 봉안하면서, 개성부의 목청전 또한 복구하기로 결정하고 이곳에도 준원전의 영정을 본떠서 그린 후 봉안하였다[『고종실록』 37년 12월 1일].
1907년(융희 1) 향사이정에 관한 칙령에 의해 영희전, 목청전, 화령전(華寧殿), 냉천정(冷泉亭), 평락정(平樂亭), 성일헌(誠一軒) 등 진전과 어진 봉안각에 모셔진 어진들을 선원전으로 옮기고 냉천정을 제외하고 나머지 전각들은 모두 국유화하였다.
[참고문헌]
■ 『춘관통고(春官通考)』
■ 김지영, 「숙종·영조 대 어진도사와 봉안처소 확대에 대한 고찰」,『규장각』27, 2004.
■ 김지영, 「19세기 진전 및 어진봉안처 운영에 대한 연구」, 『장서각』26,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