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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영조는 재위 기간 동안 10년에 1번씩 어진을 그려 총 13본의 어진을 남겼다. 이 어진들을 궁궐 안뿐 아니라 강화부의 숙종 진전 옆, 어머니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사당인 육상궁(毓祥宮), 자신의 잠저인 창의궁(彰義宮) 등에 각각 보관하였다. 강화부에는 숙종 진전으로 건립한 장녕전(長寧殿)이 있었고, 이에 대한 향사 절차를 영희전(永禧殿)에 준하여 마련하여 운영하였다. 영조는 장녕전 동편에 자신의 어진 봉안각을 마련하여 곁에서 모시는 것과 같게 하였는데, 이 봉안 전각이 만녕전(萬寧殿)이다.
[성립 경위]
영조는 즉위 후 숙종대의 진전 정책을 이어 받으면서도 봉안 장소를 여러 곳으로 확대하였다. 숙종대에 도성 안의 영희전은 국가의 공식적인 제향 장소인 진전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예관에 의한 정기적인 제향뿐 아니라 국왕이 직접 찾아가 작헌례를 올리는 규례도 정착되었다. 영조는 영희전 의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창덕궁의 선원전(璿源殿), 강화도에 장녕전에 보관되었던 숙종 어진을 펼쳐 봉안하고 정기적인 제향을 거행하였다.
21세에 숙종으로부터 은사(恩賜)받은 초상을 가지고 있던 영조는 이후 10년마다 어진을 그려 총 13본에 이르는 어진을 남겼다. 연잉군(延礽君) 시절인 21세 때의 초상화는 창의궁과 선원전에 봉안했고, 31세에 그린 초본 이후부터는 대내의 전각에 보관하였다. 그중 40세에 그린 3본 중 소본을 육상궁에, 51세에 그린 2본 중 하나를 강화부 만녕전에 봉안했다. 61세에 그린 2본은 육상궁과 창의궁에, 80세에 그린 소본은 육상궁에 봉안했다. 그 나머지 7본의 어진은 모두 궁궐 안의 태녕전(泰寧殿)에 보관하였다.
강화부 장녕전의 동쪽에는 1713년(숙종 39) 숙종의 어진을 장녕전으로 옮길 때 사용한 의장과 가마들을 보관하였다. 이곳은 장녕전을 짓기 전에 옛 장녕전이 있던 곳으로, 영조는 이곳을 수리한 후 자신의 초상화를 봉안하게 하고, 이름을 만녕으로 지었다[『영조실록』 21년 1월 9일]. 영조는 자신의 어진을 영구히 보관할 장소로 진전만 한 곳이 없다고 여겼고, 장녕전의 공간이 충분하므로 훗날 숙종의 어진과 함께 장녕전에 봉안되길 바랐다[『영조실록』 20년 8월 20일].
[변천]
1776년(정조 즉위) 정조는 즉위 후 영조의 유지에 따라 만녕전의 영조 어진을 장녕전에 봉안하도록 했다[『정조실록』 즉위년 5월 1일]. 1866년(고종 3) 프랑스군과의 전투 중에 장녕전이 전소되었지만, 숙종과 영조의 어진은 미리 옮겨져 도성 안 영희전의 숙종실과 영조실에 각각 봉안되었다[『고종실록』 3년 10월 7일].
[참고문헌]
■ 『춘관통고(春官通考)』
■ 김지영, 「숙종·영조 대 어진도사와 봉안처소 확대에 대한 고찰」, 『규장각』27, 2004.
■ 김지영, 「19세기 진전 및 어진봉안처 운영에 대한 연구」, 『장서각』26,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