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숙종은 1688년(숙종 14) 경기전(慶基殿)에 있던 태조 어진을 옮겨 그리게 한 후 도성 안 남별전(南別殿)에 봉안하였다. 1695년(숙종 21)에는 자신의 어진을 그린 후 강화부에 보관하도록 했다. 1713년(숙종 39) 강화부의 어진에 숙종의 모습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하여 새로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어진을 그렸다. 완성된 어진 2본은 각각 장녕전과 궁궐 안에 보관하였고, 초상의 초본 역시 따로 전각을 만들어 봉안하지 말라는 글을 붙여서 오대산 사고에 보관하였다. 영조가 즉위한 후 어진 봉안각이었던 장녕전에 보관된 숙종 어진을 벽에 펼쳐 봉안하고 향사 절차를 정하였다. 장녕전은 외방의 진전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성립 경위]
숙종은 1695년 강화부에 장녕전을 세우고 자신의 어용(御容)을 봉안하게 하였다. 1695년 숙종은 비공식적으로 화원 조세걸(曺世傑)에게 어진을 그리게 한 후 내시들에게 강화부로 옮겨 봉안하게 했다. 당시 강화유수(江華留守)였던 김구(金構)도 이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이서(吏胥)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황급하게 나루로 나갔을 정도로 완전히 비공식적으로 진행된 일이었다.
강화부에는 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영숭전(永崇殿)이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파괴된 상태였다. 강화유수 김구는 영정을 강화부 객헌에 임시로 봉안한 후 영전(影殿)을 신속하게 건립하여 제대로 봉안하겠다고 보고했다. 숙종은 이 영전에 ‘장녕(長寧)’이라는 칭호를 내렸다[『숙종실록』 21년 8월 7일]. 장녕전은 강화부 송악산 아래 계좌 정향에 자리 잡았다. 강화부 송악산은 현재 북산으로 불리는 곳으로 그 아래에 강화부 행궁이 있었으니, 장녕전은 강화부 행궁 안에 자리 잡은 것이다.
1713년 장녕전 어진을 대체할 새 어진을 그리기 위해 도감을 설치하였고, 어진 정본 2본을 완성하였다. 완성된 어진 하나는 궁궐 안 선원각(璿源閣)에 보관하고, 하나는 다시 장녕전에 봉안했다. 어진 초본은 정본이 완성되면 세초해 버리는 것이 상례이지만, 숙종은 이것도 오대산의 선록각(璿錄閣)에 보관하게 했다.
[변천]
숙종이 세상을 떠난 후 장녕전 내에 흑장궤에 담아 보관하던 어진을 꺼내 벽에 펼쳐 봉안하고 향사하는 절차를 영희전(永禧殿)에 준하여 마련했다[『경종실록』 즉위년 6월 21일]. 1744년(영조 21) 영조는 자신의 어진 중 하나를 강화부 장녕전 옆 가마와 의장을 봉안하는 장소에 보관하게 한 후 ‘만녕(萬寧)’이라는 이름을 내렸다[『영조실록』 21년 1월 9일]. 1776년(정조 즉위) 정조는 즉위 후 영조의 유지에 따라 만녕전의 영조 어진을 장녕전에 봉안하였다[『정조실록』 즉위년 5월 1일]. 1866년(고종 3) 프랑스 군과의 전투 중에 장녕전이 전소되었다. 봉안하던 숙종과 영조의 어진은 미리 옮겨 도성 안 영희전의 숙종실과 영조실에 각각 봉안하였다[『고종실록』 3년 10월 7일].
[참고문헌]
■ 『어용도사도감의궤(御容圖寫都監儀軌)』
■ 『춘관통고(春官通考)』
■ 김지영, 「숙종·영조 대 어진도사와 봉안처소 확대에 대한 고찰」, 『규장각』27, 2004.
■ 김지영, 「19세기 진전 및 어진봉안처 운영에 대한 연구」, 『장서각』 26,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