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초기 국가는 종이로 만든 저화를 화폐로 발행하였다. 저화는 액면가에 비하여 현물가치가 떨어지는 명목화폐였다. 따라서 저화가 교환수단으로 민간의 신용을 얻기 위해서는 액면가치에 대한 보장이 필요했다. 만약 저화의 가치에 대한 보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저화는 민간에서 퇴장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관에서는 서울과 개경에 화매소를 설치하고 저화를 액면가에 해당하는 현물로 교환해주어 가치를 보장해주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저화의 안정적 운영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화매소가 서울과 개경 이외의 지방에는 설치되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 저화는 서울과 개경과 같은 큰 도시를 중심으로 유통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초기 국가는 저화를 발행하여 시장에 교환수단을 제공하고 동시에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저화는 종이로 만들어진 화폐로 액면가보다 실질가치가 현저하게 낮아 현실적으로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대신 민간에서는 현물가치가 있는 상오승포(常五升布)와 같은 현물을 주로 사용하였다. 1402년(태종 2) 조선에서 최초로 저화를 발행했을 때부터 이러한 현상은 나타나고 있었다. 이에 관에서는 강력한 처벌규정을 내려 저화를 사용하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의 강력한 정책에도 저화는 시장에서 널리 활용되지 못하고 퇴장하였다. 1410년(태종 10) 관에서는 저화를 다시 발행하여 유통시키려고 했는데 태종대 초반의 저화 유통책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이에 저화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저화의 가치에 따라 현물을 교환해줄 필요성이 있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개경과 서울에 화매소를 설치한 것이다[『태종실록』 10년 10월 28일 네번째기사].
[조직 및 역할]
화매소는 1410년(태종 10)에 한양과 개경에 각각 설립하고, 철성군(鐵城君) 이원(李原), 의원군(義原君) 황거정(黃居正)으로 신경제조(新京提調)를 삼고,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 신유정(辛有定),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윤사수(尹思修)로 구도제조(舊都提調)를 삼아 운영했다[『태종실록』 10년 10월 28일].
[변천]
저화와 같은 지폐는 고려에서 원나라 간섭기에 이미 유통되었다. 원에서는 저화에 해당하는 교초(郊鈔)를 발행할 때에 평준고(平準庫)를 각 로(路)마다 설치하여 지폐의 액면가에 해당하는 금과 은을 교환해주어 유통을 담보하였다. 조선에서도 원의 평준고를 모방하여 저화의 가치를 보장해주려는 의도로 화매소를 설치하였지만, 태종대에만 한시적으로 서울과 개경에서 짧은 기간 동안 운영되었다. 이후 저화가 사라지면서 화매소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