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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시대 1102년(고려 숙종 7)에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건의로 제작하여 유통된 동전.
[개설]
해동통보는 고려 숙종대 유통된 동전이다. 숙종은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고 나라에 이익을 가져오게 하고자 주전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후 1097년(고려 숙종 2) 주전관(鑄錢官)을 설치하고, 1101년에는 주전도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102년(고려 숙종 7) 12월 풀무질로 금속을 녹여 거푸집에 넣어서 주조하는 고주법(鼓鑄法)을 이용하여 본격적인 해동통보 주전을 시작하였다.
[연원 및 변천]
해동통보는 996년(고려 성종 15)에 주전된 건원중보(乾元重寶)가 원활하게 유통되지 못하고 사라진 이후 주전된 동전이다. 해동통보는 관에서 설립한 주점과 상점을 통해 유통되었고 이 상점은 개경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설립되었다. 정부는 해동통보를 주전한 뒤 고위 관리·문무양반·군인에게 나누어주어, 유통을 활성화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관리들에게는 나누어준 동전의 양은 1만 5000관이었다. 또한 해동통보를 사용하도록 주현에 주식점(酒食店)을 열고 백성들이 동전으로 주식을 거래할 수 있도록 관영상점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정부 주도의 유통책에도 불구하고 해동통보 역시 유통이 지속되지 못했다. 이후 해동중보, 동국중보 등 다양한 화폐가 뒤이어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에 화폐 유통을 주장할 때 고려 때 여러 화폐가 제작되어 유통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10년 6월 8일].
[형태]
해동통보는 겉은 둥글고 안에는 사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다. 조선시대 유통된 상평통보와 외형은 같았다. 앞면에는 ‘해동통보’의 각 글자를 사방에 새겨 넣었고, 뒷면에는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았다. 해동통보의 성분은 구리가 절반 정도이며 납이 25% 정도, 주석이 20% 정도이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고려 정부는 해동통보 유통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지방에 술과 음식을 파는 주식점을 열고, 이곳을 이용하는 백성들은 해동통보로 값을 치르도록 하였다. 그 결과 해동통보가 시장에서 어느 정도 사용되기는 했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고, 해동통보는 예종대 이후 더 이상 유통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김도연, 「고려시대 은화유통에 관한 일연구」, 『한국사학보』10, 고려사학회, 2001.
■ 김병하, 「고려시대의 화폐 유통」, 『경희사학』3, 경희대학교 사학회, 1972.
■ 채웅석, 「고려전기 화폐유통의 기반」, 『한국문화』9, 규장각한국학연구소,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