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조선전기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화폐는 저화(楮貨)와 포화였다. 그러나 종이로 만든 명목화폐였던 저화는 실제 유통이 활발하게 나타나지 않아 시장에서 가치가 현저하게 낮았고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대신 포화를 저화의 보조화폐로 사용하였다. 포화는 면화, 삼베, 모시 등을 재료로 직조한 직물류가 화폐로 기능할 때 지칭하는 말이었다. 즉, 조선전기 관에서는 저화라는 고액의 명목화폐를 보완하기 위해 포화를 사용하여 소액화폐로 사용하였다. 포화는 실질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는 저화보다 오히려 널리 사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고려말과 조선초기에는 마포(麻布)가 화폐로 널리 활용되었고, 목화가 전래된 뒤 재배 지역이 확산된 뒤에는 면포도 화폐로 사용되었다. 마포나 면포의 본래 용도는 의복의 재료이지만 교환가치에 주목하여 ‘화(貨)’나 ‘폐(幣)’로 지칭하고 있었다. 이는 마포나 면포의 물품적 성격보다는 교환수단으로서의 성격에 더 주목한 결과이다. 동전 제작이 힘들어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시기에는 관에서 포화를 공식 화폐로 사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숙종실록』 13년 11월 24일].
[형태]
포화는 마포(麻布)와 면포(綿布)를 이르는데 조선초기에는 면포의 재배 지역이 널리 확산되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사용되었던 포화는 마포가 주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마포는 은병(銀甁)과 같은 고액 화폐를 보조하는 화폐로 유통되기도 했다. 면포는 관에 납부하는 세납용의 경우 씨줄 400줄을 의미하는 5승, 길이 35자(약 11m), 너비 7치(약 21㎝)의 품질을 갖추어야 했다. 물론 민간에서 거래될 때에는 길이가 규격에 미치지 못하는 단포(短布)나, 승수가 모자란 경우도 낮은 가격으로 유통되었다. 이런 경우 규격 면포보다 낮은 가격으로 거래되어 소액환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포화는 민간에서 실질적인 교환수단으로 확산되었다. 고려말 면화가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민간에서는 면포가 옷감으로 널리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거래에서도 화폐와 같은 용도로 이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에 포화라고 하면 면포를 지칭하였다. 백성들은 직물의 길이와 성근 정도를 조절하여 가치를 낮추거나 높여 활용하였다. 포화는 조선시대 들어 상평통보가 널리 확산되었던 시기에도 민간에서 여전히 소액환으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