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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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전(銀錢)

서지사항
항목명은전(銀錢)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경장은(慶長銀), 쇄은(碎銀), 원록은(元祿銀)
분야경제
유형물품 도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화폐로 유통된 다양한 형태의 은화.

[개설]
은전은 은을 주원료로 해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어져 유통된 화폐이다. 은에 구리, 주석 등을 섞어 가치를 낮추기도 했지만, 은 자체의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주로 고액환으로 사용되었다. 은전은 고려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확인된다. 고려시대에 사용된 은전은 은병(銀甁) 형태로 유통되기도 했다. 은병은 그 모양이 호리병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에 비하여 조선시대에 사용된 은전은 특별한 형태가 없이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무게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어 거래되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 들어 중국과 일본을 통하여 은이 유입되면서 사용량이 대폭 증가하였다. 당시 조선에서 생산된 은은 양이 많지 않았지만, 은 제련 기술은 상당히 발달하여 연산군대 김검동(金儉同)과 김감불(金甘佛)이 일본에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연산군일기』 9년 5월 18일]. 따라서 조선에 유통된 은의 규모는 외부에서 유입되는 양에 따라 결정되었다.

조선에 은전이 활발하게 유통된 가장 큰 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당시 명나라 군사가 참전하였을 때 식량을 조선에서 조달하고자 하였는데, 이때 군사들에게 은전을 나누어주어 식량과 교환하도록 하였다. 이때에 명군이 가지고 온 은전이 시장에 거래되면서 조선에서도 은이 활발하게 유통되기 시작했다. 명군의 참전 이후 조선의 시장에서는 모든 거래를 은으로 매개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은의 유통은 임진왜란 이후 활발해졌다. 당시 명으로부터 유입된 은의 양은 최대 900만 냥으로 추산할 수 있다.

다음으로 쓰시마[對馬]와 무역을 통해 조선에 은전이 유입되었다. 16세기 전반에 일본은 전 세계 은의 40% 이상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이에 조선은 쓰시마와 무역을 통해 은전을 수입했으며 생산량에 따라 다양한 순도의 은전이 유입되었다. 당시 일본으로부터 유입되었던 은전은 은의 함량이 80% 정도인 경장은(慶長銀), 함량이 64%밖에 되지 않았던 원록은(元祿銀) 등 종류가 다양했다. 이렇게 유입된 왜은은 조선에서 화폐로 활용되었고 청(淸)과의 무역에서 결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일본과 청으로부터 유입되는 은의 양이 줄어들면서 구리로 주조한 동전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

[형태]
은은 일상에서 교환수단으로 사용하기에는 그 가치가 너무 높았다. 따라서 은전을 정부 차원에서 유통시킬 때에도 무게에 따라 유통되었고, 형태나 외형은 특별히 정해지지 않고 다양한 모양과 크기로 무게에 따라 유통되었다. 또한 필요에 따라 은을 잘라 사용하는 쇄은(碎銀) 형태로 유통되기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조선에서 은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유통되었다. 그러나 쌀이나 면포와 같은 현물에 비해 유통량이 적어 민간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이후 국외로부터 은이 유입되자 국가뿐 아니라 상인들도 은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가치가 높았던 만큼 대량으로 물품을 거래하던 상인들이 활용하기 시작했다. ‘부상대고(富商大賈)’로 불리던 이들은 은을 활용하여 대규모로 지역 간 거래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전보다 훨씬 가볍고 편리한 화폐인 은을 사용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국제교역 시, 사치품 수입에 대한 결제 수단으로 은을 사용하자 조선에서는 은 유출을 염려하여 사용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통제정책으로 명으로 나가는 은의 양이 국가 차원에서 제한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은 산출량은 매우 적었고, 외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수입하는 은도 없었기 때문에 은이 화폐로 유통되지는 못했다.

공식적인 무역의 제재로 은과 상품의 유통이 대외적으로 제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직후 명의 참전으로 다량의 은이 유입되면서 조선에서도 은이 교환수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 참전한 명나라 군사들은 군량미와 군수물품을 모두 중국 본토에서 가지고 올 수는 없었다. 불리한 전세 탓에 신속히 참전해야 하는 시간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물리적인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군은 군량을 조선 현지에서 조달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다. 명의 황제는 명군이 출병할 때 심유경(沈惟敬)을 보내서 다량의 은을 하사하였고, 그 은으로 조선에서 필요한 군수를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명군은 이를 기반으로 조선에 파병된 군사들의 군량을 해결했다. 이로 인해 명군이 군량을 공급받을 때 그 대가로 은을 지급함으로써, 그 과정에서 은의 유통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은은 고액 화폐로 민간에서 널리 사용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아 전국적으로 유통되지는 못했다. 이후 일본에서 수입한 은이 유입되어 은전의 전체 유통 규모가 커졌다. 은전의 유통은 주로 관청 간 고액 거래 시에 많이 활용되었다. 민간에서도 일부 사용되기는 했으나 고가인 은을 소규모 거래에 활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 사용에 한계가 있었다. 이로 인해 고액 화폐를 보조하는 소액 화폐의 필요성이 증대되었고, 이는 이후 상평통보가 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한명기, 「17세기초 은(銀)의 유통과 그 영향」, 『규장각』15, 규장각한국학연구소, 1992.
■ Dennis O.Flynn, Arturo Giraldez, 「Born with a “Silver Spoon”: The Origin of World Trade in 1571」, 『Journal of World History 6』,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5.
■ Kazui Tashiro, 「Exports of Japan's silver to China via Korea and changes in the Tokugawa monetary system during the 17th and 18th centuries, Japan and the Pacific, 1540-1920」, 『International Journal of Asian Studies 4.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 [집필자] 유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