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1678년(숙종 4) 조선 정부는 상평통보를 발행하여 국가의 공식 화폐로 삼고 전국적인 유통을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에 발행된 상평통보는 발행 시기에 따라 이름과 형태가 조금씩 다르며, 종류가 3,000여 종에 이른다. 그중에 당오전은 1883년(고종 20) 2월에 박정양(朴定陽)의 책임으로 금위영에서 주전하기 시작했다. 주전된 당오전은 그해 5월부터 1894년(고종 31) 7월까지 유통되었다. 조선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다음 해에 거액의 배상금을 일본에 물게 되면서 재정의 궁핍이 심각한 상태였다. 이에 국가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고액화폐를 제작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당백전과 같이 더 큰 액면가 화폐를 주전하지 않은 이유는 당백전은 이미 1866년(고종 3)에 발행되었지만 과도하게 높은 액면가 때문에 민간에서 사용되지 못하고 퇴장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오전도 액면가격이 동전의 실질가치보다 높았기 때문에 다량으로 발행될 경우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실제 당오전이 과도하게 주전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883년 10월에 조폐 기관인 전환국(典圜局)에서만 당오전을 주전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후 1894년(고종 31) 당오전 주전을 추진했던 정치적 추진력이 약해지면서 당오전의 주전은 중지되었다.
[연원 및 변천]
당오전은 주전 결정 이후 경희궁, 창덕궁 뒤편, 만리창(萬里倉)에 설치된 세 개의 주전소에서 만들어졌다. 주로 서울·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주전이 이루어졌고, 강화도·의주 등의 일부 지방에서도 이루어졌다. 당오전의 지속적인 주전을 위해 1883년(고종 20) 7월 상설 조폐 기관인 전환국이 별도로 설치되었다. 이후 당오전은 전환국에서만 전담하여 주조되었다.
[형태]
당오전의 기본적인 형태는 상평통보와 동일하다. 단 동전의 뒷면 좌우에 각각 당(當)과 오(五) 자를 새겨 넣어 상평통보와 구별하였다. 당오전의 크기는 상평통보와 비교해 큰 편이나 주전소에 따라 크기가 조금씩 차이가 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당오전은 동전의 실질가격보다 다섯 배 정도 높은 가격으로 액면가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액면가대로 민간에서 거래되지 못했고 정부에서 당오전보다 오히려 세금 징수를 이전 화폐인 상평통보 등으로 하려고 하자 민간에서는 당오전의 가치가 더욱 하락했다. 1885년(고종 22)에는 당오전의 가격이 상평통보 1문의 가격과 동일하게 거래되기도 했다. 그마저도 황해도·충청도 등 관청과 당오전 거래가 있는 지역에서만 통용되었을 뿐, 나머지 지역에서는 가치가 액면가보다 현저하게 낮아져 유통되었다. 이에 관에서는 당오전을 서울에 상납하는 유일한 동전으로 지정하여 민간에서의 사용을 확대시키고 당오전의 가치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