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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왕세자빈을 책봉하는 의식 절차이다. 왕세자빈으로 책봉[冊嬪]을 받는 경우는 왕실 자손인 남편이 왕세자가 되어 왕세자빈으로 책봉되거나 왕세자와 혼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책봉되었다.
[연원 및 변천]
세종대에 의주(儀註)가 정비되어 조선시대 내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담당 관직명이 약간 바뀌고, 장소가 조선초기에는 경복궁 근정전에서 하고[『세종실록』 오례 가례 의식 책왕세자빈의], 조선후기에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하는 것이 다르다.
왕세자빈을 책봉하는 의례 중에 왕세자와 혼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할 때에는 왕세자납빈의(王世子納嬪儀)의 한 의절로 왕세자빈으로 책봉받았다. 책왕세자빈의와 왕세자납빈의의 책빈은 거의 모든 의절이 같은데, 책왕세자빈은 궁궐에서 책봉받는 빈수책(嬪受冊) 의례를 수행할 때에 세자궁에 속한 종2품 양제(良娣)나 종3품 양원(良媛) 등 세자의 후궁이 참여하였다. 왕세자납빈의에서는 별궁에서 책빈을 거행할 때에 악기는 늘어놓지만 연주를 하지 않는 것이 달랐다.
[절차 및 내용]
성종대에 편찬되어 조선 최고의 전례서(典禮書)로 평가되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 구체적인 의식 절차를 살펴보면, 우선 길일(吉日)을 택일하여 종묘에 고하였다. 의례를 거행하기 2일 전부터 예조(禮曹)의 지휘 아래 준비를 하였다. 의식을 거행하는 날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왕이 어좌에 오르면 종친과 문무백관이 몸을 굽혀 4번 절하고 일어나 바로 섰다. 정사(正使) 일행이 정한 자리에서 몸을 굽혀 4번 절하고 일어나 바로 서면, 전교관(傳敎官)이 정사 일행 앞으로 나아가 왕세자빈의 책봉을 선포하였다. 전교관이 정사 일행에게 교명함(敎命函)·책함(冊函)·인수(印綏)·명복함(命服函)을 전달하고 정사 일행은 각각의 채여(彩轝)에 각 함을 놓고, 의장(儀仗)의 하나인 세장(細仗)과 고취(鼓吹)를 갖추어 교명함·책함·인수·명복함, 왕세자빈의 연(輦)과 의장 및 정사 일행의 순서로 행렬을 갖추어 왕세자빈이 있는 곳으로 출발하였다.
왕세자빈이 있는 전각에서는 1일 전부터 준비를 하였다. 정사 일행이 전각의 대문 밖에 도착하여 정한 자리[使者位]에 꿇어앉아 교서의 내용을 선포하고, 교명함·책함·인수·명복함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예복(禮服) 차림의 양제 이하 모두 각각의 자리에 나아갔다. 왕세자빈이 명복(命服)을 입고 머리장식[首飾]을 갖추고 시위를 받으며 빈수책자리[嬪受冊位]에서 4번 절하고 꿇어앉아 교명함·책함·인수·명복함을 받아 수규(守閨)를 통해 안으로 들여보냈다. 왕세자빈이 엎드렸다가 일어나 4번 절하였다.
왕세자빈이 시위를 받으며 내당(內堂)으로 올라가 왕세자빈의 자리[嬪座]에 앉으면, 세자궁에 속한 양제와 양원 이하 모두 각각의 자리에 나아가 2번 절을 하였다. 왕세자빈이 답배(答拜)를 하고 물러나면 모두 물러났다. 정사 일행이 근정전 앞으로 돌아와 예를 마쳤다고 아뢰고 4번 절을 하면, 전교관이 왕에게 아뢰었다. 다음 날 왕세자빈은 왕과 왕비를 뵙고 절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