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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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두(裹肚)

서지사항
항목명과두(裹肚)
용어구분전문주석
하위어백면주유과두(白綿紬襦裹肚), 백사면주유과두(白絲綿紬襦裹肚), 백유과두(白襦裹肚), 백주겹과두(白紬裌裹肚), 백주과두(白紬裹肚), 백주유과두(白紬襦裹肚), 백초과두(白綃裹肚), 서피과두(鼠皮裹肚), 정주과두(鼎紬裹肚), 주과두(紬裹肚), 주유과두(紬襦裹肚)
관련어갑과두(甲裹肚), 요대(腰帶)
분야생활 풍속
유형물품 도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긴 저고리 형태의 남자 상의.

[개설]
남자 상의로 백색의 긴 저고리 형태이며 양옆이 트여 있다. 대부분 철릭 속에 입으며, 한삼 다음에 입게 되어 있다. 초(綃)·주(紬)·면주(綿紬)·정주(鼎紬) 등을 재료로 하여 겹옷·솜옷 등으로 만들었으며 속에 털을 댄 것도 있다. 그 외에 배나 가슴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된 남녀 공용의 넓은 허리띠, 머리쓰개 또는 수의용 머리싸개를 말한다.

[연원 및 변천]
저고리 형태의 남자 상의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철릭과 한삼 사이에 입는 옷으로 되어 있어 포보다는 짧은 상의 종류임을 알 수 있다. 철릭 이상은 정의(正衣)이고 과두 이하는 간단하고 짧은 옷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선조실록』 26년 5월 2일]. ‘과두만 입고 망건은 벗은 채’라는 기사가 있어 일종의 내복 상의인지 복부를 싸는 배가리개인지 확실치 않다[『중종실록』 16년 4월 11일].

과두의 소재는 초·주·면주·정주(鼎紬), 초·공단(貢緞)·명주(明紬)이다. 과두의 용어로는 백초과두(白綃裹肚)·주과두(紬裹肚)·백주과두(白紬裹肚)·백주겹과두(白紬裌裹肚)·백주유과두(白紬襦裹肚)·주유과두(紬襦裹肚)·백면주유과두(白綿紬襦裹肚)·백사면주유과두(白絲綿紬襦裹肚)·정주과두(鼎紬裹肚) 등이 있는데 모두 견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솜을 넣거나 겹으로 만들었다는 것으로 보아 사계절 모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호피로 안을 받친 백유과두(白襦裹肚)도 있다[『중종실록』 34년 4월 25일]. 또 서피과두(鼠皮裹肚)도 있었다[『성종실록』 5년 8월 19일]. 이것은 서피내공주유과두(鼠皮內拱紬襦裹肚)라는 기록으로 보아[『성종실록』 5년 12월 16일] 서피로 안을 댄 과두인 듯 보이나, 서피과두의 하사 일자가 여름인 것을 감안하면 서피로 겉감을 한 과두일 수도 있다. 도(道) 절도사(節度使)에게 내릴 백주과두는 여우 가죽이 없어서 안을 넣지 못한다는 기록에서도 과두에 다양한 가죽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중종실록』 20년 10월 14일].

또 『상례언해(喪禮諺解)』에 과두를 ‘배오라기’라고 한 것을 보면, 이때의 과두는 상례의 습(襲)에 사용되는 넓은 허리띠였음을 알 수 있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도 습구라고 하여 과두의 속명(俗名)을 ‘요대(腰帶)’라고 하였다.

여자들의 저고리가 짧아지게 되면서 평소에도 과두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광재물보(廣才物譜)』에는 부인의 요대를 ‘협의(狹義)’라고도 하였다. 『사례편람(四禮便覽)』에는 과두를 허리를 싸는 것으로 명주나 면포를 사용하는데 네 귀퉁이에 끈을 단다고 하였다.

[형태]
양옆에 트임이 있는 긴 저고리 형태이다. 또는 네 귀 또는 두 귀에 끈이 달린 넓은 허리띠 형태이거나 머리쓰개 형태이다.

[참고문헌]
■ 경기도박물관, 『전주이씨묘출토복식 조사보고서: 광주 고읍 인평대군파 의원군일가』, 2001.
■ 온양민속박물관, 『안동김씨분묘발굴 조사보고서』, 1989.

■ [집필자] 최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