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피변복은 강사포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하를 받을 때 입는 옷이다. 조선에서는 피변복 대신 원유관복(遠遊冠服)이라고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중국에서는 황제가 신하를 만날 때 입는 옷을 피변복이라고 하였는데 조선의 원유관복에 해당한다. 1437년(세종 19) 만일 원유관복을 청한다면 반드시 피변을 하사할 것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원유관복을 사여받기 전의 명칭이 피변복이었음을 알 수 있다[『세조실록』 5년 8월 10일].
중국의 통사(通事) 손수산(孫壽山)이 중국에서 조하할 때의 복색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황제는 피변과 조포(皂袍)이고 황태자는 익선관(翼善冠)과 홍포(紅袍)이며 군신은 공복(公服)이니, 조선의 왕은 원유관과 강사포를 갖추고 왕세자는 익선관을 쓰고 군신들은 공복을 입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피변이 아닌 원유관과 강사포를 입는 것으로 정해졌다[『세조실록』 5년 8월 10일].
이후 1500년(연산군 6) 삭망의 조하에 왕은 구량원유관을 쓰고 왕세자는 칠량원유관을 쓰는 것이 좋겠으나 중국의 친왕세자가 삭망에 착용하는 관복을 물어보고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를 확인해 본 결과 중국의 왕세자는 대조하에 면복을 갖추고 삭망에는 피변복을 갖추고 평상시에는 익선관을 쓴다고 하였으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삭망에 원유관을 쓰자고 했다[『연산군일기』 6년 12월 12일].
『대명회전(大明會典)』에는 황제와 황태자의 면복은 다 현의(玄衣)·훈상(纁裳)이고, 피변복의 경우는 천자로부터 친왕·왕세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강사포를 입었다고 하였으며[『선조실록』 29년 4월 10일], 또 황제와 황태자의 면복과 피변복은 색깔이 모두 같고, 상복(常服)은 황제는 황색을 입고 황태자는 적색을 입었다고 하였다. 조선의 『오례의(五禮儀)』에는 왕과 왕세자가 면복·강사포·곤룡포를 입는데 왕세자의 곤룡포는 흑색을 입는다고 하여 중국과는 복색에 차이가 있었으며, 명칭도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선조실록』 29년 4월 16일].
1745년(영조 21) 영조가 희생을 살피는 일을 친행하고자 그 복색을 묻자, 부제학(副提學) 원경하(元景夏)가 희생을 살피는 복색을 황조에서는 피변 혹은 통천관에 강사포로 하였다고 하자, 이번 희생을 살피는 것은 고례에 의하여 마땅히 원유관에 강사포로 하겠다고 분부했다[『영조실록』 21년 3월 28일].
[형태]
피변복에 착용한 피변관은 『삼재도회(三才圖會)』에는 사슴가죽으로 만든다고 하였으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원유관은 나(羅)로 만든다고 하였으며, 그 색은 현색(玄色)이라고 했다. 형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가례집람도설(家禮輯覽圖說)』에서는 피변의 형태를 백녹비를 가지고 만들며, 태고 시대에 머리에 쓰던 것을 형상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옛 그림에 이르기를, “녹비 가운데 털의 길이가 짧고 황백색이 나는 것을 가지고 만든다.” 하였다. 높이는 1척 2촌이다.
피변은 가죽으로 만든 위가 뾰족한 고깔형의 관모를 일컫는 것이지만, 아악에서 무무(武舞)들이 착용하는 관모도 피변이라 한다. 이는 종이를 배접하여 만들며 안에는 고운 베를 바르고 검은 칠을 하고 밖에는 얼룩노루가죽 같은 털가죽 무늬가 있는 모자로 좌우에는 구리로 만든 운월아(雲月兒)를 붙이고 청색 명주끈을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