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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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寧國寺)

서지사항
항목명영국사(寧國寺)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영국사(靈國寺)
관련어진관사(津寬寺), 수륙재(水陸齋), 수륙사(水陸社), 황보인(皇甫仁), 축수재(祝壽齋), 김수온(金守溫), 서거정(徐居正), 도봉서원(道峰書院)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세조의 축수재가 열렸던 양주 도봉산의 절.

[개설]
영국사(寧國寺)는 조선전기에 창건되어 세종 때 진관사(津寬寺) 수륙사(水陸社)의 이전 후보지로 역사에 등장하였다. 이전 계획은 백지화되었지만 도성 인근의 대찰로서 세조 때에는 국가의 축수재(祝壽齋)를 열기도 하였다. 16세기 후반 절 자리에 도봉서원(道峰書院)이 건립되었다.

[내용 및 변천]
영국사는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전기에 창건되었다. 1449년(세종 31) 진관사 수륙사의 이전 논의 과정에서 영국사가 등장한다. 진관사의 수륙사는 1397년(태조 7)에 설치되었다. 수륙재는 무주고혼(無主孤魂)을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이다. 수륙사는 이러한 수륙재를 열기 위해 국가에서 공식 지정한 사찰이다. 세종대에 와서 진관사의 수륙사가 퇴락하자 중건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진관사는 도로가 협소하고 샘물이 불결하다는 등의 이유로 수륙사 자체를 영국사로 이전하자고 하였다. 영국사는 지세(地勢)가 뛰어나고 물 또한 깨끗한 곳으로, 창건한 지 오래되지 않아 길도 평탄하니 이전에 유리하다는 견해였다[『세종실록』 31년 4월 21일]. 이전 논의는 여러 차례 계속되었고, 세종은 당시의 고승 탄주(坦珠)·신미(信眉) 등과 함께 논의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신하들이 영국사를 실제 답사하고 이전을 건의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31년 5월 2일]. 그러나 우의정 황보인(皇甫仁)의 의견에 따라 이전 논의는 백지화되었고, 결국 진관사를 중수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즉 진관사는 태조가 신중하게 정한 곳이므로 퇴락을 방치할 수 없으며, 영국사는 법을 어기고 절을 창건한 것인데 여기에 수륙사를 이전하면 범법을 국가가 인정하는 셈이라는 견해였다[『세종실록』 31년 5월 4일].

1457년(세조 3) 절에서 왕실의 건강 장수를 기원하는 축수재를 열었다. 원종공신을 위하여 설치한 관부인 충익사(忠翊司)가 주관하고 여러 공신(功臣)들이 사재를 각출하였다[『세조실록』 3년 9월 23일]. 이후 영국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전기의 문신 김수온(金守溫)의 시 「영국사(寧國寺)」와 서거정(徐居正)의 시 「도봉산영국사(道峯山靈國寺)」에 등장한다. 16세기 후반에 절은 이미 폐사되었고, 이 자리에 도봉서원(道峰書院)이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 『사가집(四佳集)』
■ 『식우집(拭疣集)』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한상길, 「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 『한국선학』23, 한국선학회, 2009.

■ [집필자] 한상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