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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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사(禪源寺)

서지사항
항목명선원사(禪源寺)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최우(崔瑀), 진명국사혼원(眞明國師混元), 지천사(支天寺), 해인사(海印寺), 대장도감(大藏都監), 판당(板堂)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에 위치해 있으며, 고려대부터 조선초까지 고려대장경 경판을 보관했던 절.

[개설]
선원사(禪源寺)는 고려가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시기인 1245년(고려 고종 32)에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崔瑀)의 원찰로서 창건되었다. 조선시대인 1398년(태조 7) 대장경판이 해인사(海印寺)로 이관된 후 언젠가 폐사되었다. 1976년 절의 옛터가 발견되었고 그 이듬해 사적 제259호로 지정되었다. 1996년 발굴을 시작하여 20여 개의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지금은 석축 등을 쌓아 정비해 놓았다. 절터에 선원사를 계승하는 법당과 유물관이 들어서 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고려는 몽골에 항쟁하기 위해 1232년(고려 고종 19) 강화로 도읍을 옮겼다. 1245년 당시 최고 집권자였던 최우가 원찰로 선원사를 창건하였다. 낙성회를 열면서 진명(眞明) 국사(國師) 혼원(混元)을 법주로 삼고 국내의 고명한 승려 3,000여 명이 초대되었다. 이듬해인 1246년 5월에는 고종이 직접 이곳까지 행차하였다. 혼원이 초대 주지를 맡아 6년간 주석하였는데, 당시 승려가 200명에 달하는 대찰로 순천 송광사(松廣寺)와 함께 고려의 2대 선찰로 손꼽았다.

1251년(고려 고종 38)에 고종이 절의 대장경 판당에 행차하였다. 1252년(고려 고종 39)에는 원오(圓悟) 국사(國師) 천영(天英)이 주지가 되어 1256년까지(고려 고종 43) 4년 동안 주석하였다. 고려는 1270년(고려 원종 11)에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이후 고려는 몽골의 간섭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1272년(고려 원종 13)에는 원나라의 다루가치로 있던 이익(李益)이 선원사를 방문, 강화의 방비 태세를 염탐하기도 했다. 1290년(고려 충렬왕 16)에는 충렬왕이 원나라 반란군 합단(哈丹)의 침입을 피해 선원사로 피난하였다. 1292년에는 선대 국왕의 실록을 선원사에 봉안하였다. 1305년 가을에 법당이 불에 타는 화를 입어 명당(明堂)과 불묘(佛廟)가 타 버렸다. 몇 해 뒤에 복구되었으나 바로 단청을 올리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309년(고려 충선왕 1)에는 대장도감과 선원사에 쌀 300석을 나누어주었으며, 1314년(고려 충숙왕 1)에는 충숙왕이 백금 10근을 선원사에 보시하여 세자 감(鑑)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후 중건과 보수가 이어졌는데 그때마다 왕실과 대신들의 시주가 있었다. 1347년(고려 충목왕 3)에는 절에서 국가의 기우도량(祈雨道場)을 설행하였다.

(2) 조선시대

조선초인 1398년(태조 7) 선원사의 대장경판이 해인사로 옮겨졌다. 강화 인근에 출몰하는 왜구의 위협을 피하려는 목적이었다. 5월 강화도를 떠난 대장경은 한강의 용산에 도착하여 잠시 지천사(支天寺)로 갔고[『태조실록』 7년 5월 10일], 이듬해 1월에는 해인사에 도착해 있었다. 대장경판이 떠난 이후 절은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억불 정책의 영향 때문이었지만, 절의 사격을 좌우하던 대장경판의 부재가 큰 이유였던 것 같다. 1530년(중종 25)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미 절은 궁중의 원예를 담당한 기관인 장원서(掌苑署)의 과수원으로 변했다고 하였다.

(3) 현대

이후 절의 정확한 위치도 몰랐으나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학술조사단의 지표 조사 중 현재의 터에서 대형의 주춧돌과 석축·범자문과 각종 막새·보상화문전 등이 발견됨으로써 선원사지로 비정되었다. 이듬해 사적지로 지정되었으나, 연구자들에 따라 절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이 터에서 발굴된 건축 부재가 궁터에 해당한다는 견해와, 선원사가 그 경역이 매우 넓다는 점과 문헌 기록에 의거하여 화산에 있었다고 보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1993년 성원이 절터 인근의 토지를 매입하여 복원 불사를 시작하였다. 1995년 해인사의 고려대장경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원 소장처였던 선원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1996년 인천광역시의 지원으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시작하였다. 2001년까지 6년간에 걸쳐 약 8,000여 평이 넘는 지역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20여 채에 이르는 대·소형의 독립 건물이 확인되었다. 이 외에도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행랑지가 8개소이며 천장이 설치되지 않은 답도(踏道) 등도 3~4개소 확인되었다. 또 소형의 탑지 내지는 부도지(浮屠址)로 파악되는 터와 예전의 건축 구조 및 양식을 알 수 있는 잔존물이 발견되었다.

현재 선원사는 각종 건물지 등을 정비하였고, 법당과 유물관 등이 들어서 있다. 한편 절 앞의 너른 땅에 연꽃 단지를 조성하여 매년 여름 연꽃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김병곤, 「사적 제259호 강화 선원사와 신니동 가궐의 위치 비정」, 『불교학보』48,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08.
■ 이종철·조경철, 「강화 선원사의 위치 비정」, 『한국선학』3, 한국선학회, 2002.
■ 한상길, 「고려대장경의 해인사 이운 시기와 경로」, 『불교학연구』30, 불교학연구회, 2011.
■ 황인규, 「고려후기 선원사의 창건과 선승들」, 『경주사학』21, 경주사학회, 2002.
■ 동국대학교박물관, 『사적 259호 강화 선원사지 발굴 조사 보고서』, 강화군, 2003.

■ [집필자] 한상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