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신앙심이 각별했던 세조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많은 살생을 저지른 데 대한 참회의 마음으로 여러 절을 창건하여 기도처로 삼았다. 복세암(福世菴)도 그 중의 하나로, 창건 초부터 국가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성종~연산군대에 왕실의 중요한 원찰로서 번성하였으나, 중종대에 폐지되었다.
[내용 및 변천]
세조가 1458년(세조 4) 이전에 죽은 자들의 명복을 빌어주는 원찰(願刹)로 창건하였다[『세조실록』 4년 2월 13일]. 1468년(세조 14)에는 절에 도둑이 들어 화로(火爐)와 승복을 훔쳐갔다. 큰 손실은 아니었지만 국왕의 원찰이었으므로 형조와 의금부 등이 총동원되어 검거에 나섰으나 범인을 잡지 못하였다[『세조실록』 14년 3월 18일]. 1469년(예종 1)에는 국왕이 족질(足疾)을 앓자 복세암을 비롯하여 목멱산(木覓山, 현 서울 남산)과 백악산(白岳山)·한강·원각사(圓覺寺) 등에서 치병 기도를 올리도록 하였다[『예종실록』 1년 1월 6일].
1470년(성종 1) 예조에서 산세에 따른 토목 공사 계획을 보고하면서 여러 절과 사당의 폐지를 건의하였다. 여기에 복세암이 포함되었으나 국왕은 관청에서 창건한 절과 사당은 폐지하지 말고 이전하도록 명하였다[『성종실록』 1년 9월 26일]. 그러나 실제로 절은 이전되지 않았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473년(성종 4)에 사간원에서 당시 흉년이 들어 재정을 축소하는데도 복세암과 원각사·내불당 등의 지원은 그대로라고 지적하고 있다[『성종실록』 4년 10월 2일]. 이후 불교의 폐단을 비난하는 여러 상소에서 복세암은 국가의 재물을 허비하는 사례로 자주 등장한다. 그때마다 선왕(先王)의 원찰이라는 명목으로 지원을 중단하지 않았다.
1478년(성종 9)에는 절에 녹두·팥 등으로 비누를 만드는 장인인 조두장(澡豆匠)이 두 명이나 있으니 옳지 않다고 지적하였다[『성종실록』 9년 8월 4일]. 아울러 절에서는 불당의 뜰을 청소하는 노비로 조라치(照剌赤)를 두고 있었는데, 이를 없애라는 건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에 소요되는 재원을 국가에서 부담했던 듯하다. 이듬해에는 왕이 장차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길 예정인데 절이 궁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으므로 이를 철거할 것을 건의하였다[『성종실록』 10년 윤10월 18일]. 이 건의는 1481년(성종 12)까지 계속되었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이 해에 흉년이 들어 절에 지급하는 쌀을 반으로 줄였다[『성종실록』 12년 7월 12일]. 1487년(성종 18) 무렵 절에는 십수명의 승려가 있었고, 매년 국가에서 지급받는 소금과 말장(末醬, 메주), 쌀 등의 양이 세조의 원찰이었던 원각사와 비슷한 규모였다.
이와 같이 복세암은 성종대에 국왕과 왕실의 비호를 받다가 1503년(연산군 9) 연굴암(演窟庵)과 함께 철거되었다[『연산군일기』 9년 11월 26일]. 궁궐을 내려다보는 위치라서 불경하다는 신하들의 지속적인 건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철거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고, 국가의 지원은 예전대로 계속되었다[『연산군일기』 9년 11월 28일]. 1530년(중종 25)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미 폐사되었다고 하였으므로 연산군대까지만 존속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