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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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神勒寺)

서지사항
항목명신륵사(神勒寺)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원당(願堂), 능침사(陵寢寺)
하위어벽사(甓寺)
동의어보은사(報恩寺)
관련어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나옹화상(懶翁和尙), 대장각(大藏閣), 영릉(英陵), 이색(李穡), 세종(世宗), 정희왕후(貞熹王后), 민제(閔霽)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의 능침사로, 경기도 여주시 봉미산에 있는 절.

[개설]
신륵사(神勒寺)는 고려말의 고승인 나옹 화상의 부도와 석종비가 있으며 영릉의 능침사찰이다. 고려말 이색은 대장각을 건립하여 고려대장경을 인출하여 이곳에 보관하였다. 이 대장경은 조선초 일본이 거듭하여 대장경을 달라고 요구하여 일본에 보내졌다. 예종대에는 세종을 모신 영릉을 이장하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왕릉을 관리하는 능침사가 되었다. 왕실의 원당으로서 조선말까지 각종 지원을 받아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경기도 여주시 봉미산(鳳尾山)에 위치한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에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창건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한다. 신륵사 경내에 벽돌로 만든 탑이 있기 때문에 벽사(甓寺)라고도 불렸다. 7단의 돌 기단 위에 6층의 벽돌로 만든 이 탑은 고려말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신륵사를 벽사라고 불렀던 최초의 기록이 1411년(태종 11)이었던 것에서 이러한 추정은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태종실록』 11년 6월 29일].

신륵사의 명칭에 얽힌 전설이 두 가지가 있는데 이를 통해 절 이름의 유래와 창건 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즉 ‘신륵(神勒)’이란 ‘신비한 굴레’ 혹은 ‘신비하게 제압하다’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러한 명칭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먼저 고려 고종 때 건너 마을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너무 사나워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인당(印塘) 대사가 나서서 말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다고 한다. 신비하게 제압했다고 하여 인당 대사가 머무는 곳을 신륵사라고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고려 우왕 때 현재 신륵사 강가에 있는 바위 부근에서 용마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懶翁) 화상이 신비하게 제압했다고 하여 신륵사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나옹 화상이 활약하던 고려말에는 이미 신륵사가 창건되어 있었기 때문에 창건 시기는 고려중기 즈음으로 유추할 수 있다.

(2) 고려말~조선초

고려말에 이르러 신륵사에는 나옹 화상이 주석했다. 1347년 28세의 나이에 원나라에 유학을 가서 1358년에 귀국했다. 유학하던 동안 임제종의 종사 평산처림(平山處林)을 만나 선법(禪法)을 인가받았고 인도 승려 지공(指空)에게 수학하였다. 고려로 돌아온 나옹 화상은 1371년(고려 공민왕 20)에 왕사(王師)가 되어 가을부터 경기도 양주에 있는 회암사(檜巖寺)에서 거처하며 절을 중수하였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376년 4월에 회암사의 준공을 알리는 낙성식(落成式)을 거행했는데 유례없이 많은 신도들이 모여들어 회암사 절 문이 미어질 지경이었다. 당시는 왜구의 침입 등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있었던 과도한 토목 공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가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관(臺官)들이 이때의 낙성식을 빌미로 나옹 화상을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조정에서는 나옹 화상을 경상도 밀양에 있던 영원사(瑩源寺)로 추방할 것을 결정하였다. 나옹 화상은 회암사를 떠나 영원사로 가던 도중 병이 들어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 신륵사에 나옹 화상의 부도가 건립되었다.

또 고려말 신륵사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을 건립하고 대장경을 인출하여 봉안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1383년(고려 우왕 9)에 이숭인(李崇仁)이 지은 「신륵사대장각기」에 그 내용이 전한다. 그 기록에 따르면, 이색(李穡)의 아버지 이곡(李穀)이 승려 상총(尙聰)의 권유로 대장경을 인출하여 봉안하고자 하였지만 서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이색은 아버지의 못다 이룬 서원을 상총으로부터 전해 들었지만 바쁜 공무로 인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이후 1371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또 1374년에 공민왕도 승하하였다. 이즈음 다시 상총으로부터 간곡한 부탁을 받고 이색은 선왕(先王)의 명복을 빌고 선친의 뜻을 이루기 위해 대장경 봉안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1380년(고려 우왕 6) 2월부터 시주금을 모으고 나옹의 문도들의 도움을 받아 대장각을 건립하고 대장경을 인출하는 데 필요한 종이와 먹을 준비하고 장정(裝幀)한 책을 담기 위해 함(函)을 만들었다. 드디어 1382년 정월에 인출을 마치고 개경 영통사에서 교열한 후 4월에 배에 실어 신륵사에 이르러 대장각에 봉안하였다. 이색은 당시 성리학자들의 대표격으로서 불교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불교계의 그릇된 폐단을 비판할 뿐 불교 자체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색은 많은 불교 경전을 탐독했고 좌선의 고요함을 즐겼다. 결국 1396년에 5월에 더위를 피하기 위해 여주에 갔다가 병이 들어 신륵사에서 죽었다.

이색이 대장경을 인출할 때 여러 부의 대장경이 인출되었는데 염흥방(廉興邦)이 시주하여 인출했던 1부는 현재 일본 교토의 오타니(大谷)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신륵사에 봉안했던 대장경도 일본에 보내졌지만, 그 행방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일본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대장경을 요구하였다. 거듭되는 요구에 정종은 대장경판을 주기로 약속하기도 하였다[『정종실록』 1년 7월 21일]. 태종 역시 일본의 대장경 요구에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던 대장경판을 일본에 보내자고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의 반대로 대장경판을 보내지 않고 인출한 대장경을 보내기로 하고, 신륵사에 봉안되어 있던 대장경 전부를 보냈던 것이다[『태종실록』 14년 7월 11일].

(3) 조선시대

조선전기 신륵사에는 태종의 장인이자 원경왕후의 아버지였던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세종실록』 22년 8월 13일]. 세종은 신륵사에 거주하는 승려들이 민제의 영정을 잘 모시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장성(長城) 백암사(白巖寺) 승려 학몽(學蒙)에게 신륵사에 주석하면서 중수를 하라고 명하였다[『세종실록』 29년 7월 9일].

세종은 살아생전 부왕의 곁에 묻히기를 희망하여 경기도 광주 대모산의 헌릉(獻陵) 서쪽 언덕에 묻혔다. 하지만 이후 왕실에서 크고 작은 흉사들이 끊이질 않자, 세조비 정희왕후는 영릉이 길지(吉地)가 아니라는 이유를 내세워 1469년(예종 1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예종실록』 즉위년 12월 26일].

영릉이 이장된 후 신륵사는 능침사(陵寢寺)로서 세종의 원당(願堂)이 되었고 보은사(報恩寺)로 개칭되었다. 보은사는 ‘선왕의 은혜에 보답하는 절’을 의미하였으므로 그렇게 부른 것이었다. 신륵사가 세종의 원당이 됨에 따라 왕실에서는 절을 중수하도록 명하였다. 하지만 대신들은 과중한 비용 부담을 이유로 거듭 반대하였지만 성종은 선왕을 위한 일이라며 중수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성종실록』 3년 7월 21일].

신륵사가 왕실의 원당이 된 후 거주하던 승려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였던 것 같다. 1538년(중종 33)에는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유생 30여 명이 신륵사에서 숙식을 하였는데, 절에 주석하던 승려들이 유생들을 도적이라고 하면서 몽둥이로 난타하여 상해를 입힌 사건이 발생하였다. 싸움이 발생한 동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유생들에게 몽둥이질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승려들의 자부심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신륵사 승려들을 서울로 압송하여 다스릴 것을 요구하였지만 성종은 엄벌에 처할 것을 명하면서도 지방의 해당 관아에서 추국하도록 하였다[『중종실록』 33년 9월 19일].

신륵사는 조선후기에도 왕실의 지원을 받아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다. 정조는 공명첩을 발급하여 중수하도록 원조하였고[『정조실록』 20년 8월 25일], 순조 때에는 왕실의 암묵적 허락을 받아 절을 중수하였던 것 같다. 예조 판서 김이도(金履度)가 신륵사 승려들이 왕실의 복을 기원한다는 명목으로 궐내의 막중함을 빙자하여 불사를 벌이려 하는데 이는 유학을 숭상하는 왕의 덕에 허물이 되는 일이라고 간언하자 순조가 잘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였다[『순조실록』 8년 4월 25일].

[참고문헌]
■ 김상현, 「신륵사의 역사와 인물」, 『사찰조경연구』제9집, 동국대학교 사찰조경연구소, 2002.
■ 박용진, 「고려 우왕대 대장경 인성과 그 성격 : 이색 찬 고려대장경 인성 발문과 신륵사 대장각기를 중심으로」, 『한국학논총』37,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

■ [집필자] 이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