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범굴사(梵窟寺)

서지사항
항목명범굴사(梵窟寺)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원당(願堂)
동의어대성암(大聖庵), 호굴사(虎崛寺)
관련어불량계(佛粮契), 상궁(尙宮), 영응대군이염(永膺大君李琰), 불량권(佛粮券), 불량시주기(寺佛粮施主記)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세종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원당으로,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에 있던 절.

[개설]
범굴사(梵窟寺)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자세한 기록이 없다. 세종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원당으로서, 세조와 성종은 범굴사의 각종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19세기에는 불량계(佛粮契)를 통해 사찰 운영비를 조달하였는데 여기에 상궁들이 참여하였다. 임오군란 때 모두 불탔으나 20세기 초에 중창하였고, 현재는 대성암으로 불리고 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범굴사는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峨嵯山)에 있던 절로, 647년(신라 진덕여왕 즉위)에 의상 대사가 개창하고, 1375년(고려 우왕 즉위)에 나옹 화상이 중창하여 대성암(大聖庵)으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했는데 어느 때인가 폐사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별도로 전하는 기록이 없어서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2) 조선전기

범굴사와 관련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의 여덟째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의 원당(願堂)이라는 실록 기사이다[『성종실록』 22년 3월 2일]. 영응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 가운데 막내로, 세종이 살아생전 매우 총애한 아들이었다. 영응대군은 1467년(세조 13)에 세상을 떠났는데[『세조실록』 13년 2월 2일],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부인 송씨는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곳곳에서 불사를 벌여 조정에서 자주 지탄을 받았다. 범굴사 또한 송씨가 영응대군을 위해 조성한 원당이었다.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범굴사를 원당으로 정한 것은 남편의 묘가 이 절과 인접한 지역인 양주 군장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때의 범굴사는 영응대군의 묘를 보호하는 재실(齋室)로 지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00년에 고종황제 능역이 그 자리에 조성되면서 영응대군 묘가 시흥시 군자동으로 이전되었고, 범굴사의 원당 기능도 자연히 사라져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절은 원래 호굴사(虎崛寺)라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대에 사복시제조(司僕寺提調)가 아차산 아래 망올리(芒兀里)에 옛 목장 터가 있는데 호굴사 북쪽 언덕에서부터 남쪽으로 광진(廣津)에 이르기까지 3리라고 하였다[『세조실록』 13년 1월 12일]. 이 기록에서 지칭하는 아차산과 광진 인근에 범굴사가 위치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때의 호굴사는 범굴사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호굴사가 나중에 범굴사로 바뀌게 된 것은 호랑이를 범이라고 불렀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성종대에는 범굴사로 지칭하는 기록이 보이는데, 성종은 영응대군의 원당인 범굴사(梵窟寺)에 부세(賦稅)를 제외한 잡역을 면제하라고 지시했다[『성종실록』 22년 3월 2일]. 이 기록에서는 ‘호(虎)’ 대신 ‘범(梵)’이라는 한자를 적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성종대 이전에 일반적으로 불리던 범굴사라는 명칭을 불교의 바라문을 의미하는 ‘범(梵)’자를 음차하여 한자로 기록한 것 같다.

(3) 조선후기

19세기의 범굴사 관련 기록으로서 「범굴사불량권(梵窟寺佛粮券)」과 「범굴사불량시주기(梵窟寺佛粮施主記)」를 들 수 있다. 이 기록은 현재 범굴사 자리에 세워져 있는 대성암의 법당 뒤편 바위에 새겨져 있다. ‘불량’이란 부처님의 양식이라는 뜻으로 사찰을 운영하기 위한 자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불량권은 사찰 운영을 위해 마련된 불량답(佛粮畓)의 목록이고, 불량시주기는 시주한 사람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그런데 18~19세기에 전국 사찰에서 불량계(佛粮契)가 유행하였고, 또 시주자의 이름을 대체로 "○○생 □□□양주(○○生 □□□兩主)"라고 하였는데, 이는 19세기에 많이 보이는 기록 형식이다. 그리고 불량권에 ‘경술년(庚戌年)’이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아마도 이 글을 새긴 시기는 1850년(철종 1)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불량시주기 명단에 상궁김씨수열(尙宮金氏守烈), 상궁김씨족금(尙宮金氏足今), 상궁양씨복련(尙宮梁氏福連), 상궁강씨유월(尙宮姜氏六月) 등 4명의 상궁 이름이 등장한다. 이는 당시까지 범굴사가 왕실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국사찰전서』에 의하면, 1750년(영조 26)에 거사 방지성(方智性)이 폐사가 된 그 자리에 초암(草庵) 한 칸을 지었고, 그 후에 운악산 승려 전령(展翎)이 전각을 확장하였으나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모두 불탔다. 1912년에 문정념(文正念)이 그 자리에 요사 4칸을 짓고 이듬해에 극락전을 세웠으며, 1936년에 주지 안보광(安寶光)이 중성전(衆聖殿)을 중건하고 1942년에 극락전을 중수했다고 한다. 하지만 범굴사가 현재의 대성암으로 개명된 시기는 언제인지 불분명하다.

[참고문헌]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윤종일, 『구리·남양주 문화유산기행』, 국학자료원, 2003.

■ [집필자] 이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