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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오봉사(五峰寺)는 고려 때 창건되어 시흥종(始興宗) 사찰로 번성했다고 한다. 조선 태종 때 시흥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고, 17세기 숙종 때 중수되었다고 한다. 1907년(순종 즉위) 정미의병(丁未義兵) 때 의병 운동의 본거지로 지목되어 폐사되었다. 일제 때 중수되었으나 6·25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이 전소되었다. 1991년에 복원 사업을 시작하여 현재 법당, 요사채 등이 있고 연천 지역의 군 장병들이 법회를 열고 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오봉사의 창건주와 창건 연대는 미상이고, 신라 또는 고려시대에 창건한 절로 추정한다. 고려말에는 시흥종(始興宗)에 속한 절로 비교적 융성했다고 전한다.
(2) 조선시대
1407년(태종 7) 12월, 연주(漣州: 현 경기도 연천) 오봉사가 시흥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 11개(혹은 12개) 종파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연주 오봉사는 시흥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이나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하여 지정한 사찰로, 오봉사가 연주 지역을 대표하는 명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절의 연혁은 알려진 것이 없고 1667년(숙종 3) 화주 경열(敬悅)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3) 근현대
1907년 정미의병 때 일제에 의해 절이 의병의 은신처로 지목되어 습격을 받았고 승려들이 흩어지면서 거의 폐사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김도현이 주지로 부임하여 총독부로부터 일본인에게 빼앗긴 절 소유의 토지 일부를 찾고 건물을 중수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건물 대부분이 전소되고 이후 절이 군사 작전 지역에 편입되어 오랫동안 복원되지 못했다.
1991년 군종 박철균의 주선으로 서진과 효란이 발원하여 절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현재 법당 하나와 요사채가 있고, 연천 지역의 군부대 장병들이 모여 법회를 열고 있다.
[문화재]
오봉사지 부도(五峰寺址 浮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1호)는 오봉사지에서 서쪽으로 약 150m 떨어진 곳에 있는 사리탑이다. 높이 2.1m, 둘레 3.17m로 전체적으로 탑신은 석종형 부도의 일반형을 따르고 있다. 오봉선사(五峰禪師)의 사리탑으로 추정하고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