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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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흥사(重興寺)

서지사항
항목명중흥사(重興寺)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삼각산(三角山), 보우(普愚), 김시습(金時習), 북한산성(北漢山城),치영(緇營)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임진왜란 이후 북한산성의 승군 주둔지가 된, 경기도 고양시의 절.

[개설]
중흥사(重興寺)는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고려말기의 고승(高僧) 보우(普愚)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조선초기에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이 출가하여 오랫동안 기거하면서 시를 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하면서 이 절의 그 규모가 커졌다. 더욱이 산성 수호를 위해 전국에서 동원된 승병들의 지휘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대표적인 병영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내용 및 특징]
중흥사는 고려후기의 승려 보우가 중건하고 절 동쪽 봉우리에 집을 짓고 살며 ‘태고(太古)’라고 편액했는데 이것이 훗날 태고사(太古寺)의 전신이다. 세종대의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중흥사만 나오고 태고사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조선초에 중흥사로만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세종대에는 불교계 통폐합 정책에 따라 선종 사찰에 소속시키고 밭 200결을 분배해 주기도 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이 오랫동안 기거했다고 한다. 그는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을 하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전국 각지를 유랑한 인물이다.

중흥사에는 김시습과 관련된 여러 설화들이 전승돼 오고 있다. 그 설화에 따르면 김시습은 중흥사에 기거하면서 매번 비가 온 뒤에 산의 계곡 물이 불어나면 작은 종이 100여 장을 들고는 시냇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여울이 급하게 흐르는 곳을 골라 앉았다고 한다. 그리고 생각에 잠겨 시를 지었는데 절구나 율시, 오언고풍을 종이에 써서 물에 흘려보냈다고 한다. 종이가 멀리 흘러가는 것을 보면 또 쓰고 또 흘려보내기를 더러 저녁을 마칠 때까지 하여 종이가 다 떨어지면 그때서야 돌아왔다. 어떤 때는 하루에 지은 것이 수백여 편에 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변천]
중흥사가 일대 변화를 보인 것은 두 차례의 전란이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조정에서는 도성 외곽에 축성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에 1659년(효종 10)에 송시열(宋時烈)에게 명하여 성을 수축하게 하였다. 1710년(숙종 36)에는 우의정(右議政) 김창집(金昌集), 좌윤(左尹) 김진규(金鎭圭),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 등이 북한산을 살펴보고 돌아와, 왕에게 북한산의 형세가 천험(天險)이 되며 안도 매우 험준하여 지키는 시설을 배치하기가 어려우나 피란시에는 도성(都城)의 가까운 곳에 이같은 곳은 다시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중흥사에 백제의 궁터가 있는데 창고를 지을 만하다고 지세를 보고하였다. 이에 숙종은 여러 신료가 함께 가서 보고 결정하자고 하였다[『숙종실록』 36년 12월 18일].

1711년(숙종 37)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하여 둘레 7,620보의 석성(石城)북한산성이 완성되었다. 사실 이러한 산성 수호의 논의는 임진왜란 당시에도 전개된 바 있다. 1596년(선조 29)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이 북한산의 지형을 살피고 돌아와 각 도의 승려를 소집하여 요해처(要害處)에 집을 짓게 하고서 지역을 나누어 역(役)을 맡겨주어 산성을 수축하게 하면, 백성들의 정서도 안정되고 믿는 곳이 있게 되어 일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고한 바 있다[『선조실록』 29년 3월 3일].

숙종대에 산성을 쌓고 난 후에는 산성 안에 중흥사·용암사(龍巖寺)·보국사(輔國寺)·보광사(普光寺)·부왕사(扶旺寺)·원각사(元覺寺)·국녕사(國寧寺)·상운사(祥雲寺)·서암사(西巖寺)·태고사(太古寺)·진국사(鎭國寺) 등 11개 절을 두어 산성 수호를 담당하고 승병의 주둔지로 삼았다. 이 가운데 중흥사가 북한산성을 수호하는 승병과 사찰을 지휘 감독하였는데, 지휘소인 치영(緇營)이 있었다. 우두머리인 총섭(摠攝) 1명은 종전부터 거주하는 승려 중에서 임명하였는데, 1797년(정종 21)부터는 수원유수 조심태(趙心泰)의 간청에 의하여 용주사(龍珠寺)의 승려로 번갈아서 임명하게 하였다. 1710년(숙종 36)에는 왕이 거둥할 때 임시로 머무를 수 있는 행궁(行宮)을 중흥사 자리에 설치하는 문제가 논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산세로 보면 적임지이지만 이전에 산사태가 절을 덮친 적이 있어 무산되었다[『숙종실록』 38년 11월 10일].

조선후기 북한산성을 유람했던 이덕무는 중흥사가 산성 내의 11개 사찰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크다고 하였는데, 당시 149칸이나 되었다.

1828년에는 대웅전과 만세루를 중건하였다고 한다. 1894년 화재와 1915년 홍수로 석축이 허물어지고 터만 남아있었지만, 현재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견한잡록(遣閑雜錄)』
■ 『농암집(農巖集)』
■ 『만기요람(萬機要覽)』
■ 『상촌집(象村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월사집(月沙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집필자] 오경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