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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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사(藏義寺)

서지사항
항목명장의사(藏義寺)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교종(敎宗), 삼십육사(三十六寺)
관련어신의왕후(神懿王后), 참경법회(懺經法會), 반승(飯僧), 축수(祝壽), 내자시[內資寺], 망월사(望月寺), 수륙사(水陸舍), 신륵사(神勒寺), 기재(忌齋), 진관사(津寬寺), 흥덕사(興德寺), 장춘랑(長春郞), 파랑(罷郞), 총융청(摠戎廳)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하나로, 서울 북한산 자락에 있던 절.

[개설]
장의사(藏義寺)는 7세기 중반 신라 무열왕이 창건하였고 고려시대에도 중시된 사찰이다. 조선전기에는 세종대 선·교 양종의 교종 18개 사찰 가운데 하나였고, 태조비인 신의왕후(神懿王后)의 기신재가 열리는 등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연산군 때 철폐되었고 현재의 장의사는 새로 세워진 것이다.

[연원]
장의사는 659년(신라 무열왕 6) 신라 무열왕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고려시대 1027년(고려 현종 18)에는 장의사와 인근 사찰에서 당시의 금령을 어기고 술을 주조하여 처벌되기도 했지만, 예종, 인종, 의종 등 역대 왕들이 절에 행차하는 등 높은 위상을 가졌다.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성을 건설할 때 장의사의 불상과 금자 『화엄경(華嚴經)』을 경기도 광주에 있는 망월사(望月寺)로 옮기게 하였다. 망월사는 17세기 전반에 축성된 남한산성 내의 9개 사찰에 들어갔다.

[변천]
태조대에 장의사에서는 왕실과 관련된 법회와 재회가 자주 열렸다. 12인연 법회를 비롯하여 정종과 태종의 생모인 신의왕후의 기재(忌齋)가 설행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태조실록』 7년 2월 14일] [『태조실록』 7년 9월 22일]. 태종대에도 이 절에서 참경(懺經) 법회가 열렸고 금으로『법화경(法華經)』을 사경하였다[『태종실록』 8년 6월 9일].

세종대에는 선왕의 기재 봉행을 내자시[內資寺]에서 주관하고 장의사에서 거행하며 선후(先后)의 기재는 내섬시(內贍寺)에서 담당하여 진관사(津寬寺)에 설행함을 관례로 정하였다. 이에 태종의 첫 기재가 장의사에서 설행되었다[『세종실록』 3년 1월 19일] [『세종실록』 4년 5월 15일].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초재(初齋) 또한 장의사에서 열렸는데 당시 왕실의 상장례를 거행할 때 반승(飯僧)의 규모가 8,000~9,0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세종실록』 28년 3월 29일].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이때 장의사는 교종 18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장의사에서 원래 보유하던 토지가 200결이었는데 이때 50결이 더해져 250결이 되었고 거주 승려는 120명이 허용되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이는 교종도회소인 흥덕사나 해주 신광사(新光寺)와 같은 규모였고, 교종 18개 사찰 가운데 왕실의 능침사인 연경사(衍慶寺)와 주요한 원당인 표훈사(表訓寺)의 경우만 더 많은 전지와 승려를 인정받았다. 『세종실록』 「지리지」 한성부 항목에서는 장의사가 창의문(彰義門) 밖에 위치하며 교종 소속으로 전지 250결이 내려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조가 즉위한 후 공신들을 관리하는 충훈부(忠勳府)와 충익사(忠翊司)가 축수(祝壽) 재회를 각각 장의사와 영국사(寧國寺)에서 베풀었다[『세조실록』 3년 9월 23일]. 세조는 왕비와 함께 장의사에서 법회를 열었고[『세조실록』 6년 3월 20일], 절에 수륙사(水陸舍)를 만들게 하였는데 세조가 장의사에 행차하였을 때 사리가 여러 개로 나뉘고 오색구름이 나타나는 등 기이한 현상이 일었고, 이에 불상을 봉안하였다[『세조실록』 9년 7월 2일] [『세조실록』 9년 9월 5일]. 성종대에도 왕실의 기재를 장의사에서 설행한 사례가 종종 보이며 홍문관 관원들의 독서당(讀書堂)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반면 장의사의 위전(位田) 중 100결이 여주 신륵사(神勒寺)로 옮겨지거나 전세(田稅)의 2/3를 관에서 징수케 하는 조치도 내려졌다[『성종실록』 5년 7월 15일] [『성종실록』 15년 5월 10일].

연산군대 초반에도 왕이 장의사에서 수륙재를 거행하고 절의 중수를 위해 군사를 보내는 등 매우 호의적이었다[『연산군일기』 즉위년 12월 29일] [『연산군일기』 2년 9월 8일]. 하지만 연산군이 생모의 복위 문제로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불교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즉 도성 내의 주요 사찰과 양종 도회소가 철폐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왕명에 의해 장의사는 비워졌고 불상도 삼각산의 절로 옮겨지게 되었다[『연산군일기』 10년 7월 14일] [『연산군일기』 10년 7월 17일]. 이어 장의사 앞에 이궁(離宮)을 만들면서 화단 조성을 위해 장의사를 철거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7월 1일] [『연산군일기』 12년 2월 30일].

17세기에는 장의사 터에 총융청(摠戎廳)이 세워졌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사(高麗史)』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남한지(南漢志)』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 [집필자] 김용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