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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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사(津寬寺)

서지사항
항목명진관사(津寬寺)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선종(禪宗), 삼십육사(三十六寺)
관련어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 수륙사(水陸社), 수륙재(水陸齋), 기신재(忌辰齋), 기일재(忌日齋), 칠칠재(七七齋), 신혈사(神穴寺), 성녕대군(誠寧大君), 선종(禪宗), 대자암(大慈菴), 영국사(寧國寺)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전기 대표적인 국행수륙도량으로, 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중 선종에 속한 절.

[개설]
진관사(津寬寺)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위치한 사찰이다. 조선초 태조가 수륙사를 조성하기 이전 진관사의 연혁은 분명치 않으나 사찰이 위치한 삼각산(三角山)의 여러 사찰과 고려 왕실의 관계 등으로 미루어, 조선 건국 이전부터 진관사도 삼각산의 명찰로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관사는 태조가 수륙사를 조성하고 국행수륙재를 설행하면서 조선전기 대표적인 국행수륙도량이자 왕실의 천도도량으로 중시되었으나 16세기 국행수륙재가 중지되면서 퇴락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 및 변천]
진관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진관사 연혁에 대해 「진관사사적기(津寬寺事蹟記)」 등을 참조하여, 고려 현종이 천추태후의 위협을 피해 출가하여 신혈사(神穴寺)에 머물며 진관(津寬) 대사(大師)의 보호를 받았는데, 즉위 후 스승을 위해 진관사를 창건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현종 이후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등장하는 신혈사는 곧 진관사를 의미한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현종을 숨겨주었다고 하는 노승(老僧)이 진관 대사라는 것은 사찰의 전승으로, 언제부터 이렇게 불렸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가 없다. 또한 진관사로 사명을 바꾸었다고 하나, 현종 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에서 신혈사는 계속 등장하지만 진관사라는 사명은 발견되지 않는다. 조선초 기록이나 혹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진관사가 신혈사를 계승한 사찰이라는 언급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진관사는 불우(佛宇)조에, 신혈사는 고적(古迹)조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고려시대의 신혈사와 진관사를 동일한 사찰로 보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조선전기 두 절은 별개의 사찰로 있었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진관사에 대한 뚜렷한 기록은 없으나 진관사가 위치한 삼각산에는 신혈사나 승가사(僧伽寺) 등 고려 왕실에서 중시하던 사찰들이 있었고, 삼각산의 위치 또한 한양 도성에서 가까웠던 관계로 사찰 자체는 이미 이름이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건국 후 진관사는 국가에서 수륙재를 설행하기 위한 수륙사(水陸社)로 지정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397년(태조 6) 1월 태조가 진관사에 행차한 것을[『태조실록』 6년 1월 28일] 시작으로 연산군대에 이르기까지 진관사에 대한 많은 기록을 전하고 있어, 대자암(大慈菴), 흥천사(興天寺) 등과 함께 조선전기 대표적인 왕실원당이자 수륙도량으로 특별히 관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 1년 11월 28일].

1397년 태조의 진관사 행차는 수륙사 창건과 관련되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수륙사 건립과 관련된 것은 권근(權近)의 「진관사수륙사조성기(津寬寺水陸社造成記)」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1397년 1월 수륙도량을 조성할 만한 장소를 찾아보라는 왕명으로 진관사가 결정되어, 1월 27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9월 공사가 완료되자 태조가 직접 행차하였다[『태조실록』 6년 9월 24일]. 진관사 수륙사는 무엇보다도 조종(祖宗)의 명복을 빌고 중생들을 복되게 하기 위해 조성된 국행수륙사였다. 2월 15일에 설행되던 진관사 수륙재는 1414년(태종 14) 왕명으로 설행일자가 1월 15일로 변경되기도 하였으나[『태종실록』 14년 2월 6일], 조선전기 국행수륙재의 사찰이자 태조가 조영한 사찰로 중시되어 함부로 훼철할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수륙재 설행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진관사에는 수륙위전(水陸位田) 100결을 주었고, 설행 비용이 부족한 경우에는 국가에서 별도의 곡식을 하사하기도 했다[『태종실록』 15년 11월 16일].

또한 진관사에서는 국행수륙재 외에도 왕실 구성원을 위한 사적인 수륙재도 설행되었다. 1418년(태종 18)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설행하였고[『태종실록』 18년 3월 3일], 1421년(세종 3)에는 선후(先后) 즉 원경왕후(元敬王后)의 기일재(忌日齋)는 내섬시[內贍寺]가 진관사에서 올리는 것을 영구한 법식으로 삼아, 왕실의 칠칠재(七七齋), 소상(小祥), 대상(大祥)을 비롯한 천도재를 담당하는 중요 사찰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파이던 불교 교단을 선·교 양종으로 정리하고 선종과 교종에 각각 18사씩 36개사를 공인하였다. 이때 진관사는 선종 18사 중의 하나로 지정되었는데[『세종실록』 6년 4월 5일], 당시 진관사가 가지고 있던 전지는 60결이었으나 세종은 90결을 추가하여 주었으며, 별도로 수륙위전으로 100결을 더 내려 주고 절에 거주하는 승려는 70명으로 정하였다.

1449년(세종 31) 진관사 수륙사는 샘물이 불결하고 땅이 좁다 하여 수륙사를 영국사(寧國寺)로 옮기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세종실록』 31년 4월 21일]. 이후 수륙사 이전 논의는 계속되었으나 결국 진관사를 수리하여 계속해서 수륙사로 이용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문종대 대자암 수리와 맞물려 진관사 수리 역시 다시 논란이 되었으나 1451년(문종 1) 5월 수륙사가 준공되었고[『문종실록』 1년 5월 18일], 이후에도 진관사 공사는 문종 재위 동안 계속 진행되었다.

진관사에서의 왕실 수륙재는 성종대까지도 계속 설행되었는데, 대개 칠칠재를 돌아가면서 설행하는 사찰 중 하나였다. 1483년(성종 14) 8월 왕명으로 양종의 사찰 중 진관사를 비롯한 7개 사찰은 선왕(先王)이 특별히 보호했던 곳이므로 잡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하는 조처를 내렸다[『성종실록』 14년 8월 16일].

수륙재는 조선초부터 설행된 유일한 국가 불교 의례였으나 수륙재가 설행되던 조선전기 내내 많은 비판을 받아 세종대를 거쳐 16세기에 이르게 되면 상당히 축소되었다. 그런데, 진관사에 대한 기록은 1504년(연산군 10) 윤4월 대행대비(大行大妃)의 칠칠재 가운데 두 번째 재를 진관사에서 설행토록 한 것을[『연산군일기』 10년 윤4월 10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은 전하지 않아 이러한 모습은 연산군대의 폐불에 가까운 상황과 함께 국가적인 수륙재 설행의 위축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19~20세기 초에 걸쳐 여러 차례 진관사가 중수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타는 피해를 입었고 1964년 다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참고문헌]
■ 『양촌집(陽村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문명대 편, 『진관사 수륙재 학술논총』, 한국미술사연구소, 2009.
■ 이정,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1.
■ 강호선, 「조선 태조 4년 국행수륙재 설행과 그 의미」, 『한국문화』62, 2013.
■ 윤무병, 「국행수륙재에 대하여」, 『백성욱박사 송수기념 불교학논문집』, 1959.
■ 한상길, 「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 『한국선학』23, 2009.

■ [집필자] 강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