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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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복사(演福寺)

서지사항
항목명연복사(演福寺)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선종(禪宗), 삼십육사(三十六寺)
동의어보제사(普濟寺),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 당사(唐寺), 대사(大寺)
관련어담선법회(談禪法會), 태조10찰(太祖十刹), 비보사탑(裨補寺塔), 도선(道詵), 공양왕(恭讓王), 강금강(姜金剛), 대종(大鐘), 5층탑(五層塔), 문수회(文殊會), 선종(禪宗), 개경(開京)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태조 이성계가 왕조 개창을 기념해 탑을 중수한 개성의 사찰로, 세종대에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선종에 속한 절.

[개설]
연복사(演福寺)는 경기도 개성시 한천동에 위치해 있었다. 연복사의 원래 이름은 보제사(普濟寺)였으나 고려후기에 연복사로 바뀌었다. 919년(고려 태조 2) 고려 태조 왕건이 개경을 고려의 수도로 정하면서 창건한 10개 사찰 중 하나로, 고려시대 대표적인 선종 사찰이자 도선(道詵)의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에 바탕하여 조성한 절로 알려져 있다. 조선 건국 후 태조가 5층탑을 대대적으로 중창하였고, 성종대까지는 절이 존속하였으나 명종대에는 폐사된 것으로 확인된다.

[연혁]
고려시대 연복사는 처음에 보제사(普濟寺)로 불리며 개경에 세운 10사(十寺)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중요한 사찰이었다. 광명사(廣明寺), 서보통사(西普通寺)와 함께 3대 선우(禪宇)라고 불릴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절이었으며, 3년에 한번씩 담선법회(談禪法會)가 개설된 곳이기도 했다.

보제사의 위치와 규모는 고려 인종대에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기록에 잘 설명되어 있는데, 정전(正殿)인 나한보전(羅漢寶殿) 서쪽에 거대한 5층탑이 있고 맞은편에는 큰 종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전기에는 보제사,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 당사(唐寺), 대사(大寺) 등으로 불렸으나 어느 시기엔가 절 이름이 바뀌어 원 간섭기 이후로는 기록에 연복사로 전한다. 또 여말선초 연복사 중수 과정에서 남겨진 기록에 의하면 연복사에는 세 개의 연못과 아홉 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도선의 비보사탑설에 의거한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연복사는 개경의 비보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복사는 원 간섭기 이후 종과 탑이 각각 중수되었다. 1346년(고려 충목왕 2) 원 황제의 명을 받고 금강산에 와서 종을 주조한 고려 출신 환관 강금강(姜金剛)이 충목왕과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요청으로 못쓰게 된 지 오래된 상태로 있던 연복사 종을 새로 주조하였다. 현재 개성 남대문에 걸려 있는 이 종은 원의 장인이 조성한 까닭에 원나라 종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연복사는 공민왕 때가 되면 거의 퇴락하여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공민왕은 퇴락한 연복사탑 중수 공사를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공양왕대까지도 연복사는 퇴락한 상태로 존속한 듯하다. 이는 5층탑전(塔殿)과 3개의 못, 9개의 우물이 모두 퇴폐한 지 오래되었다고 한 공양왕대의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1390년(고려 공양왕 2) 공양왕이 연복사탑을 중수하려 하자 신흥사대부들은 격렬한 배불 상소를 연달아 올려 연복사탑 중수 공사를 반대하고, 불교 자체를 배척하며 사원경제 혁파를 주장하여 공사가 중단되었다.

[내용 및 변천]
신흥사대부들의 반대로 중단된 연복사탑 공사는 조선 건국 후 태조에 의해 재개되어 완성되었다. 권근(權近)이 찬술한 중창기에 의하면, 위에는 불사리를 안치하고 가운데는 대장경을 두었으며, 아래에는 비로초상(毗盧肖像)을 두었다고 하여 비로자나불상을 가장 아래층에 봉안했음이 확인된다. 5층으로 이루어진 연복사탑 중수는 1393년(태조 2)에 완료되어 태조는 이를 기념하는 문수법회(文殊法會)를 개설하고 직접 행차하여 참여했으며 태조와 각별한 관계에 있던 왕사 무학자초(無學自超)가 선을 강설하였는데[『태조실록』 2년 3월 28일], 4월 2일에도 문수법회를 개설하고 태조가 왕비와 함께 연복사에 가 문수법회에 참여하였다는 기록이 있어[『태조실록』 2년 4월 2일] 여러 날에 걸쳐 설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해 겨울, 태조는 연복사에서 반승(飯僧)하고 5층탑에 봉안한 대장경을 열람하였고, 자초로 하여금 강설을 주관하게 한 뒤 낙성식을 설행하였다[『태조실록』 2년 10월 17일]. 1394년(태조 3) 2월과 3월에 걸쳐 연복사에서 문수법회가 개설되었고, 이때에도 태조는 왕비와 함께 친히 법회에 참여하였다[『태조실록』 3년 2월 14일].

연복사는 태종대에 대표적인 기우도량이기도 했다. 가뭄이 심하면 승려들을 모아 연복사에서 비를 빌었기 때문이다[『태종실록』 2년 7월 2일]. 또한 세자의 딸이 병이 들자 연복사에 병의 치유를 기원하는 구병도량(救病道場)을 개설하는 등 왕실의 원찰로서의 기능도 하였으며[『태종실록』 11년 7월 29일], 왕명으로 연복사 수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태종실록』 18년 5월 28일].

1424년(세종 6)에는 기존의 7개 불교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선종과 교종 각각 18개씩 36개의 사찰만을 공인하는 대대적인 불교 통제 정책이 추진되었는데, 이때 연복사는 선종 18사에 포함되었다. 당시 연복사에는 전지가 100결 있었는데 이때 100결을 더 주었다고 하며, 사찰에 거주할 수 있는 승려는 100명으로 정해졌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그러나 점차 연복사의 사세는 기울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425년(세종 7) 연복사에 있던 철확(鐵鑊) 2개를 녹여 작은 가마솥을 주조하여 각 고을과 참(站)에 나누어 주어 춘추 강무 때의 민폐를 없애도록 하자는 경기감사의 요청에 따라 연복사의 철확을 녹여 사용하였다[『세종실록』 7년 1월 15일]. 성종대 유호인(兪好仁)의 개성 지역 유람기인 「유송도록(遊松都錄)」에 의하면 연복사 5층탑과 권근이 찬술하여 새긴 연복사탑중창비 및 대종이 그대로 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종대에 연복사는 이미 폐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551년(명종 6) 개성부 유생들이 올린 상소에 연복사 터는 황폐해졌으나 흔적은 남아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명종실록』 6년 2월 4일]. 이로 미루어 절은 없어지고 5층탑만 남아 있었던 것 같은데, 이 탑마저도 1563년(명종 16) 개성유수 이건(李楗)이 사위를 맞이하기 위해 탑 위에 올라가 비둘기를 잡게 하던 중 횃불에서 불똥이 떨어져 전소되어 사라졌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가정집(稼亭集)』
■ 『양촌집(陽村集)』
■ 『속동문선(續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이병희, 『고려후기 사원경제 연구』, 경인문화사, 2008.
■ 변광석·신나경, 「조선시대 개성의 연복사를 통해본 지역성 탐색」, 『역사와 담론』56, 2010.
■ 황인규, 「여말선초 연복사 탑의 중영과 낙성」, 『동국역사교육』7·8, 1999.

■ [집필자] 강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