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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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효사(崇孝寺)

서지사항
항목명숭효사(崇孝寺)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선종(禪宗), 삼십육사(三十六寺)
관련어목청전(穆淸殿), 원당(願堂), 진전(眞殿), 영전(影殿), 배동(背洞), 안정방(安定坊), 계명전(啓明殿)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태조 이성계의 진전인 개성의 목청전에 세워진 왕실원당으로, 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 가운데 선종에 속한 절.

[개설]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의 진전(眞殿) 중 하나였던 목청전(穆淸殿) 남쪽에 조성된 사찰로 조선전기에 조성된 대표적인 왕실원당이다. 목청전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살았던 개성의 잠저(潛邸)에 세워진 태조의 진전으로 태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었다. 목청전은 개성 숭인문(崇仁門) 안 안정방(安定坊) 어배동(御背洞)에 위치하였다. 숭효사는 연산군~중종대를 거치면서 왕실원당으로서의 위상이 쇠락하였고, 임진왜란으로 목청전이 소실될 때 함께 불타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목청전은 1901년 고종이 중건하였으나 숭효사는 중건되지 못하였다.

[내용 및 변천]
1418년(태종 18) 2월부터 태종은 어머니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齊陵) 배례를 이유로 개경에 가 5개월 간 머물던 중 5월 30일 태조의 영전을 봉안한 영전(影殿) 즉 진전 공사를 시작하였다. 위치는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 배동(背洞)의 태조 잠저로 하였다. 이 해 즉위한 세종은 10월에 태조 진전 공사를 살펴보기 위해 직접 개성에 가 비용을 하사하였고, 이듬해인 1419년(세종 1) 4월 진전이 완성되자 세종은 상왕 태종과 함께 새로 지은 개성의 태조 진전으로 행차하였다. 7월 태조 진전의 이름을 계명전(啓明殿)으로 하였으나 고려 태조 진전의 이름과 같다고 하여 1422년(세종 4) 1월 목청전(穆淸殿)으로 이름을 고쳤다.

태종은 목청전 공사를 하면서 불당(佛堂)과 승사(僧舍)도 같이 지었는데[『세종실록』 1년 4월 22일], 5월 3일 낙성되었다. 상왕이었던 태종은 세종에게 불당의 이름을 짓고 종문(宗門)에 속하게 하고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세종실록』 1년 5월 3일]. 이에 세종은 개성 태조 진전의 불당을 숭효사라 이름하였고, 천태종에 속하게 하였으며[『세종실록』 1년 5월 22일], 태조의 넷째아들인 이방간(李芳幹)의 노비와 감로사(甘露寺) 노비 100인을 모두 숭효사에 속하게 하였다[『세종실록』 1년 5월 29일]. 12월에는 숭효사 노비 중 수강궁(壽康宮)과 관련된 노비는 수강궁으로 이속하고, 그렇지 않은 노비는 관에 이속하도록 명하였다[『세종실록』 1년 12월 4일]. 이후 숭효사는 대표적인 왕실원찰 중의 하나로 중시되었으며, 1424년(세종 6) 4월 불교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36개의 사찰만을 공인할 때 숭효사는 선종으로 통합되어 선종 18찰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원속전이 100결 있었는데, 여기에 100결을 더 주었고 항상 절에 거주하는 승려는 100명으로 하였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숭효사에 대한 국가와 왕실의 후원은 성종대에도 계속되어 곡식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성종실록』 5년 9월 27일], 매년 반승(飯僧)의 비용으로 국가에서 소금 50석을 별도로 하사하였다[『세종실록』 18년 1월 23일]. 이처럼 숭효사는 태조 진전에 부속된 사찰로서 중시되었는데, 성종대까지 왕이 목청전에서 직접 친제를 지냈던 것과 큰 관련이 있다. 그러나 연산군대 이후 친제를 지내지 않게 되면서 목청전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줄어들고 관리도 소홀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숭효사에서 먼저 나타나는데, 1496년(연산군 2)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는 숭효사가 목청전 남쪽에 근접해 있어 화재의 위험이 있고, 절에 있는 승려도 2~3명에 불과하니 철거하기를 청했다. 이에 연산군은 승정원에 숭효사 창건 연혁을 물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연산군대가 되면 숭효사에 대한 왕실의 관심과 인식이 급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연산군은 숭효사는 선대에서 진전을 위해 창건한 사찰이라는 이유로 철폐하지 말고 보수할 것을 명해 사찰이 다시 중수되었다. 그러나 이 기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숭효사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연산군대 이후 어향(御鄕)이라는 개성의 위상이 쇠퇴하면서 숭효사도 함께 쇠퇴한 것으로 보이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목청전은 수록되어 있으나 숭효사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1593년 임진왜란 중 목청전이 불타 주춧돌만 남게 되었는데[『선조실록』 26년 1월 28일], 숭효사도 이때 함께 완전히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대부터 숙종과 영조대에 이르기까지 목청전을 중건하자는 논의가 계속되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01년 2월 고종은 개성의 옛터에 목청전을 중건하고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였으나 숭효사는 세우지 않았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안선호·홍승재, 「조선시대 태조 진전의 건축 특성과 공간 구성」,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225, 2007.
■ 최재복, 「조선초기 왕실불교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한희숙, 「조선시대 개성의 목청전과 그 인식」, 『역사와 담론』65, 2013.

■ [집필자] 강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