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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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사(開慶寺)

서지사항
항목명개경사(開慶寺)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선종(禪宗), 삼십육사(三十六寺)
관련어건원릉(建元陵), 재궁(齋宮), 능사(陵寺), 조계종(曹溪宗), 관음(觀音), 대장경(大藏經), 칠칠재(七七齋), 원찰(願刹), 현릉(顯陵), 내수사(內需司), 위판(位版), 반승(飯僧), 전단관음(栴檀觀音), 법화법석(法華法席)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 태조의 능인 건원릉의 능침사.

[개설]
개경사(開慶寺)는 태조 사후 태종에 의해 건원릉(建元陵)의 능침사(陵寢寺)로 창건되었다. 본격적으로 불교 교단을 정리했던 태종이 창건한 사찰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데, 세종대까지 대표적인 왕실원찰로서 기능하였다. 문종 사후 인근에 현릉이 조성되면서 개경사의 위치가 문제가 되어 성종 무렵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16세기까지는 사찰이 존재했으나 18세기에는 이미 폐사된 것으로 확인된다.

[변천과 내용]
(1) 태종~세종대

1408년(태종 8) 5월 24일 태조가 세상을 뜬 뒤 건원릉(建元陵)이 조영되었다. 태종은 부왕의 능을 조성하면서 지은 건원릉의 재궁(齋宮)에 개경사라는 이름을 붙여 사찰로 삼았다. 이는 태조의 능침사로 개경사가 창건된 것을 의미하는데[『태종실록』 8년 7월 29일], 조계종(曹溪宗) 사찰로 삼고 노비 150구와 전지 300결을 정하여 사찰에 속하게 했다.

그런데 태종은 이에 앞서 대대적인 불교 개혁을 단행하면서 1405년(태종 5) 국가가 지정한 사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찰에 속한 전답과 노비를 환수하여 국가에 귀속시켰고, 2년 후인 1407년(태종 7)에는 7개의 종파로 종단을 축소하였다. 또한 각 절에 속한 전답과 노비의 수를 제한하였고, 정한 액수 이상의 전답과 노비는 모두 속공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당시 개경사는 능사인 관계로 개경사에 속한 전답과 노비를 공인하는 과정에서 이미 정한 규정을 초과하였다. 그리하여 원래 조계종에 속했던 흥천사(興天寺)화엄종(華嚴宗)으로 이속하면서 흥천사에 속해 있던 전민을 속공하였다. 대신 화엄종에 속했던 지천사(支天寺)는 사신 영접관인 태평관(太平館)에 머무는 사신들의 수행단이 머무는 관사로 만들고, 지천사에 속해 있던 전답과 노비를 모두 흥천사로 이속함으로써 사사(寺社)의 정액(定額)을 맞추었다[『태종실록』 8년 10월 21일].

이후 태종은 다른 사찰에 있던 탑과 불상 등을 옮기고 대장경을 옮겨오는 등 태조의 능침사인 개경사 장엄에 노력을 기울였다. 1410년(태종 10)에는 경기도 장단(長湍)의 송림현(松林縣) 선흥사(禪興寺) 탑을 개경사로 옮겼고[『태종실록』 10년 4월 8일], 1412년(태종 12)에는 개경사 주지 성민(省敏)의 청으로 경주 백률사(栢栗寺)에 있던 전단관음상(栴檀觀音像)을 옮겨와 봉안하였다[『태종실록』 12년 10월 18일]. 이에 앞서 태종은 개경사에 직접 행차하여 공사 상황을 살펴보면서 태조가 예전에 자신에게 주었던 관음도를 봉안하기 위해 절 북쪽에 건물을 짓기로 결정하였다[『태종실록』 12년 9월 12일]. 이듬해인 1413년(태종 13) 개경사에서 관음전(觀音殿) 법석이 개설된 것으로 보아 건물 공사가 완료된 것을 알 수 있으며, 태조가 주었다는 관음도와 백률사에서 가져온 관음상은 이 관음전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태종실록』 13년 5월 19일]. 권근(權近)의 「개경사관음전행법화법석소(開慶寺觀音殿行法華法席疏)」는 이때 왕명으로 찬술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태종실록』에도 1413년(태종 13) 개경사에 봉안하기 위해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을 인쇄하도록 하고 그 비용은 경상도에서 지급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태종실록』 13년 3월 11일].

이렇게 조성된 개경사는 무엇보다도 태종의 능사로서 기능하였기 때문에 조선전기 역대 군왕들이 건원릉에 행차하여 참배하고 난 뒤에는 으레 개경사에 곡식을 하사하였으며, 태종 사후 설행된 칠칠재(七七齋) 중 두 번째와 네 번째 재가 개경사에서 이루어지는 등[『세종실록』 4년 5월 22일] 왕실에서 설행하는 칠칠재도 여러 차례 개경사에서 개설되었다.

또한 왕실에서는 세종과 양녕대군, 효령대군 및 대비가 개경사에 피병을 하기도 했으며[『세종실록』 2년 6월 6일], 약사도량이나 관음도량을 개설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4년 5월 4일]. 그리고 개경사는 태조의 능침사인 관계로 태조의 위판(位版)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불전 앞 기둥에 봉안하고 날마다 밥을 올렸다고 한다[『세종실록』 29년 10월 11일].

한편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이때 개경사는 선종 18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당시 개경사의 원속전은 400결, 사찰에서 지내는 승려는 200명으로, 회암사(檜巖寺) 다음으로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1434년(세종 16)에 건원릉에서 왕이 직접 설행하는 별제일(別祭日)에는 개경사 승려들에게 반승(飯僧)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고[『세종실록』 16년 4월 12일], 왕실의 능침사인 관계로 유생들의 출입을 금지하여[『세종실록』 25년 10월 24일],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는 등 개경사에 대한 왕실의 지원과 보호는 세종대에도 계속되었다.

이처럼 개경사에 대한 왕실의 후원으로 개경사에서는 불사가 성행하였는데, 이는 부녀자들의 잦은 사찰 왕래를 야기하였고, 그에 따라 조정에서는 부녀자들의 사찰왕래를 막고자 하였다[『세종실록』 16년 5월 2일].

(2) 단종~연산군대

건원릉 가까이 위치한 개경사의 입지는 문종 사후 근처에 현릉을 조성하면서 문제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개경사가 현릉 근처에 있으니 철거해야 한다는 대간(臺諫)의 상소가 있은 뒤[『단종실록』 1년 1월 11일], 풍수를 통해 논의가 구체화되어 개경사를 이건할 만한 곳을 물색하여 옮겨 짓는 것으로 결정되었다[『단종실록』 1년 4월 7일]. 그러나 이때 바로 이전 공사가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개경사가 현릉 동쪽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하여 남쪽 계곡으로 이전하였다고 하므로, 단종대의 이전 논의 이후 어느 시기엔가 사찰을 옮겨지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선종대 인혜대비와 인수대비가 개경사를 중창할 때 풍수학 제조로 하여금 절터를 정하도록 한 것으로 보아 [『성종실록』 14년 8월 8일], 실질적인 이건은 성종대에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인근에 현릉까지 들어서면서 왕실 능사로서 개경사의 위상은 더욱 높아져, 건원릉 행차 외에도 왕이 현릉에 친히 제사 지낸 뒤 개경사에도 곡식이 하사되었다. 이러한 관례는 성종대까지도 계속되었다[『성종실록』 2년 2월 20일]. 비록 개경사가 왕실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은 절이기는 했지만 성종대에는 사찰 자체는 이미 많이 퇴락한 것으로 보인다. 개경사가 민가에 섞여 있고 거의 다 허물어진 것을 안타까워 한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생전에 개경사를 중창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뜨자, 인혜대비(仁惠大妃)와 인수대비(仁粹大妃)가 개경사를 새로 중창하였다[『성종실록』 14년 8월 26일]. 1484년(성종 15)에는 내수사에서 개경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15년 12월 17일]. 개경사는 연산군대 기록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1497년(연산군 3) 경연에서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의 능침사를 문제삼으면서 개경사가 거론되는데, 이때 개경사에 대해 매우 협소하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자리를 옮겨 중창된 개경사는 원래 건원릉 인근에 있던 것에 비해 규모가 크게 줄어들고, 연산군대가 되면 절 자체가 상당히 퇴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연산군일기』 3년 7월 7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사찰이 확인되나, 『범우고(梵宇攷)』에는 폐사된 것으로 되어 있어 16세기 이후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동문선(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범우고(梵宇攷)』
■ 국사편찬위원회 편,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전통의 흐름』, 두산동아, 2007.
■ 우정상, 「개경사고」, 『조선전기불교사상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1985.

■ [집필자] 강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