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석류(石榴) 열매는 지름 6~8㎝에 둥근 모양이며, 단단하고 노란 껍질이 감싸고 있고, 과육 속에는 많은 종자가 들어 있다. 먹을 수 있는 부분은 약 20%로 과육은 새콤달콤한 맛이 난다. 석류나무의 껍질과 뿌리, 열매와 열매 껍질은 말려서 약으로 사용한다.
[원산지 및 유통]
원산지는 페르시아로 한나라 때 장건(張騫)이 서역에서 들여왔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중·남부 지방에서 주로 꽃나무로 재배되고 있다. 석류나무(Punica granatum)의 열매는 10월에 익으며 불규칙하게 갈라져서 연한 붉은색의 투명한 씨를 드러낸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석류는 경상도의 경주부 양산군과 동래현·창녕현·영산현·현풍현에서 나고, 진주목의 사천현·진해현에서 난다. 전라도 전주부의 익산군·고부군·금구현·임피현·태인현·고산현·여산현에서 나고, 나주목에서는 영암군·영광군·강진현·함평현·남평현·무안현·고창현·흥덕현에서 나고, 남원도호부에서는 순창군·구례현·광양현에서 나고, 장흥도호부에서는 담양도호부, 순천도호부, 무진군·보성군·낙안군·고흥현·화순현·진원현에서 나고, 강원도 삼척도호부의 평해군(平海郡)에서 난다.
[연원 및 용도]
석류라는 이름은 중국이 페르시아를 안석국(安石國)이라 불렀는데 안석국에서 자라는 나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석류는 고대 솔로몬왕 시대부터 음료수와 빙과를 만드는 데 널리 이용되었고, 석류의 꽃과 덜 익은 열매의 껍질은 붉은색 염료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과즙은 빛깔이 고와 과일주를 담그거나 농축과즙을 만들어 음료나 과자를 만드는 데 쓰인다. 한의학에서는 줄기·가지·뿌리의 껍질은 구충제로 쓰이고, 열매껍질은 설사·혈변·탈항·구충 등에 효능이 있는 약재로 쓰인다.
궁중에서는 석류를 감상용으로 정원수로 키웠고, 식용은 공물로 들여왔다. 1428년(세종 10) 상림원(上林園)에서 강화부(江華府)에 감자(柑子)·유자(柚子)·석류·모과(木瓜) 등의 각종 과목을 재배하도록 청하였고[『세종실록』 10년 12월 9일], 1505년(연산군 11) 장원서(掌苑署) 등에 명하여 치자·유자·석류·동백·장미에서 여느 화초에 이르기까지 모두 흙을 붙여서 바치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4월 9일]. 1698년(숙종 24) 왕이 한가한 날에 감상하도록 석류 몇 분을 밖으로부터 들여와 심었다[『숙종실록』 24년 7월 5일].
1502년(연산군 8) 공물로 바치는 석류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별례방으로 봉진하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 8년 9월 25일]. 1546년(명종 1)에는 자전이 경상감사에게 제철이 아닌 물건으로 가을에 나는 광어(廣魚), 생복(生鰒), 석류 등을 봉진하지 말라고 하였다[『명종실록』 1년 2월 19일]. 조선시대 궁중의 연회에 나오는 생실과의 종류는 40여 가지인데, 모든 연회상에 석류 고임을 했고 분량은 125~700개가 소요되었다.
[생활민속 관련사항]
석류는 안에 많은 종자가 들어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다산(多産)의 상징이었다. 혼례복인 활옷이나 원삼의 문양에는 포도·석류·동자 문양이 많이 보이는데, 이것은 포도·석류가 열매를 많이 맺는 것처럼 자손을 많이 낳으라는 뜻이 담긴 것이다. 혼례복과 혼수·침구·가구 장식 그리고 민화의 소재로 자주 쓰였다.
[참고문헌]
■ 이성우, 『동아시아 속의 고대 한국식생활사연구』, 향문사, 1992.
■ 황혜성 외, 「궁중의 식생활」, 『한국음식대관』6권 , 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