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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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옹방(司饔房)

서지사항
항목명사옹방(司饔房)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사옹원(司饔院), 전선사(典膳司)
동의어사선(司膳), 상식사(尙食司), 선주원(膳廚院), 주원(廚院),
관련어공궤(供饋), 공판(供辦), 물선(物膳), 선수(膳羞), 어선(御膳)
분야생활 풍속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왕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을 관장한 관아.

[개설]
조선시대에 왕과 왕실가족의 식생활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부로 왕의 식사[御膳支供] 및 궐내 음식물의 공급[闕內供饋] 등을 관장하는 아문이다. 주원(廚院), 상식사(尙食司)라고도 한다. 이는 주거를 위하여 축조한 궁궐, 왕과 왕비의 의복 등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상의원(尙衣院)과 더불어 왕실의 의식주를 위한 필수적인 설비와 제도의 하나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어선(御膳)의 어(御)는 신하가 왕에게 진상한다는 뜻이고, 선(膳)은 음식물을 갖춘다는 뜻이다. 공궤(供饋)는 사람에게 음식을 드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옹방(司饔房)은 왕과 왕족의 식사뿐 아니라 대궐 안에 드나드는 관원이나 빈객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사옹의 옹(饔)은 음식물을 잘 익힌다는 뜻으로 『주례(周禮)』의 주(註)에는 할팽전화(割烹煎和)의 뜻으로 고기를 베어 삶고 간을 맞춘다는 뜻으로 풀이되어 있다.

1392년(태조 1) 어선과 궐내 빈객에게 공판(供辦)하는 일을 맡아 절물(節物) 천신(薦新)과 진상(進上) 물선(物膳)을 관장하는 사옹방을 설치하였고, 1467년(세조 13) 4월 사옹원(司饔院)으로 개편하였다. 문소전(文昭殿)의 천신을 관장하였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사옹원의 담당 업무는 ‘어선지공과 궐내 공궤로 왕·왕비·왕세자의 선수(膳羞) 조달과 음식 만들기와 아울러 대궐에 출입하는 빈객에 대한 공판을 담당한다. 사옹원은 우선 어선지공을 위하여 전국 각 읍으로부터 진상 물선을 거두어들였다. 사도시에서 전세로 거둔 미곡과 진상 물선으로 취사(炊事)하여 어선을 올렸다. 음식을 만드는 실제 조리 업무는 궐내각차비(闕內各差備)가 담당하였다. 또한 궐내에서 왕 또는 왕비의 탄신연·곡연(曲宴)·종친연(宗親宴) 등 각종 연회를 비설하였으며, 왕의 수렵·온정(溫井) 행행·강무(講武) 등 궐외 행행시의 식사를 지공하였다[『태종실록』 10년 9월 26일]. 그리고 궐내에 업무차 상시로 출입하는 관원과 입직 관원, 입번 군사도 공궤하였고, 그 밖에 궐내에 출입하는 관원에게도 선반(宣飯)을 지공하였다.

소속 관원은 정(正: 정3품) 1명, 첨정(僉正: 종4품) 1명, 판관(判官: 종5품) 1명, 주부(注簿: 종6품) 1명, 직장(直長: 종7품) 2명, 봉사(奉事: 종8품) 3명, 참봉(參奉: 종9품) 2명을 두었다. 여기에 무록관(無祿官)인 도제조 1명, 제조 4명, 부제조 5명 등 제조 10명과 제거(提擧: 정·종3품) 2명, 제검(提檢: 정·종4품) 2명이 소속되어 있다. 무록관은 녹봉 없이 전지(田地)만 지급받는 관원이다.

사옹원 제조는 어선지공을 총괄하여 감독하였다. 특히 종친 제조는 국왕의 식사 시에 입시하여 응대하였다. 도제조는 사옹원이 수취하는 진상 물선을 받아들이거나 점퇴(點退)하고, 왕·왕비·대비·세자전의 선수(膳羞) 감독을 총괄하여 그 임무가 막중하였다. 제조 3명과 부제조 4명은 종친이 담당하고, 도승지가 부제조를 예겸하게 되어 있다. 즉 사옹원 제조와 부제조는 사실상 국왕의 친족인 종친과 도승지가 담당하였다. 특히 종친 제조는 종친 중에서도 현능하거나 국왕이 특히 총애하는 자로 임명하였고, 문신 제조도 대개 부마·외척 혹은 총신(寵臣)이 담당하였다[『성종실록』 1년 1월 24일].

[변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攷)』에 따르면 1392년(태조 1)에 고려의 사선서를 그대로 두어 “어선(御膳)과 궐내의 공찬(供饌)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게 하였고 후에 사옹원으로 개치(改置)하여 이 업무를 계승하였다.”고 하여, 사옹원이 고려 사선서의 후신으로 이조(吏曹)에 소속된 정식 아문임을 알 수 있다. 1395년(태조 4)에 완공한 신궁인 경복궁 양전(兩殿)에 사옹방을 설치하였고[『태조실록』 4년 9월 29일], 세자전 사옹방 반감(飯監)인 환관이 선수를 직접 살피지 않았다고 하여 치죄한 기록으로 보아 세자전에도 사옹방을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태종실록』 6년 4월 28일]. 한편 창덕궁을 완공하였을 때 양전의 수라간(水剌間)과 더불어 사옹방을 배치하였다[『태종실록』 5년 10월 19일].

그 후 1405년(태종 5)에 육조의 분직과 속아문을 규정할 때는 사선서와 더불어 이조(吏曹)에 소속되었다[『태종실록』 5년 3월 1일]. 1567년(세조 13)에 사옹방을 사옹원으로 개칭하였고 비로소 녹관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전선사(典膳司)로 개칭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송수환, 『조선전기 왕실재정연구』, 집문당, 2002.
■ 한우근 외 역, 『譯註 經國大典-註釋篇』,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 [집필자] 한복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