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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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柑子)

서지사항
항목명감자(柑子)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홍귤(紅橘)
관련어감귤(甘橘), 금귤(金橘), 당금귤(唐金橘), 당유자(唐柚子), 대귤(大橘), 동정귤(洞庭橘), 등자(橙子), 산귤(山橘), 석금귤(石金橘), 소귤(小橘), 청귤(靑橘), 유감(柚柑), 유자(柚子)
분야생활 풍속
유형식재료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천신제를 지낼 때 올리던 제물의 하나로 생과로 먹고 약재로도 이용한 감귤나무과에 속하는 감자(柑子)나무의 열매.

[개설]
감자나무의 열매로 제주도산의 토종 감귤이다. 홍귤(紅橘)이라고도 한다. 겉껍질과 속껍질 안에 과즙이 든 작은 알맹이들이 시고 단맛을 낸다. 조선시대에는 10월의 천신제(薦新祭) 제물이었다. 생과를 식용으로 하고, 과육과 껍질은 약용으로 사용하였다.

[원산지 및 유통]
인도에서부터 한반도를 포함한 동남북아시아에 걸쳐 넓은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재배하여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재배하였는지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예종대에 일본국에서 감자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전라도 제주목의 토산으로 되어 있다. 감자는 유자(柚子), 동정귤(洞庭橘), 유감(乳柑), 청귤(靑橘) 등과 함께 제주도에서 진상되었다[『세종실록』 3년 1월 13일].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감자를 진상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비을개(金非乙介), 강무(姜茂), 이정(李正), 현세수(玄世守), 이청밀(李靑密), 김득산(金得山), 양성석이(梁成石伊), 조괴봉(曹怪奉) 등은 제주도에서 진상할 감자를 가지고 배를 타고 오다가 바람을 만나 류쿠국[琉球國]으로 표류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0년 5월 17일]. 또 한양으로 가지고 오는 도중에 감자가 상하여 진상할 양을 채우지 못하면 사서라도 채워야 했으므로 이중의 재원이 필요했다. 영조대에는 빈전(殯殿)에 천신할 당금귤(唐金橘)과 감자를 봉진하지 않은 제주목사(濟州牧使)를 엄중히 다스릴 것을 청하는 상소가 있었다. 감자가 흉작이므로 전례대로 숫자를 감해서 종묘 등에 천신할 것을 청하는 상소는 고종 때만 20여 차례에 이른다.

세종대에는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과일을 상림원(上林園)에 납부하지 않고, 내자시(內資寺)와 내섬시(內贍寺)에 납부하게 하여 폐단이 있으니, 상림원으로 납부하게 하였다. 과일의 결실은 그 해와 지방에 따라 잘되고 못되는 수가 있는데, 각 지방에 고정된 액수를 한결같이 상납하게 하는 데는 폐해가 있다고 지적하였다[『세종실록』 8년 2월 4일]. 상림원은 국가의 수용에 감당할 감자, 유자, 석류(石榴), 모과(木瓜) 등의 각종 과목 심기를 건의하였다[『세종실록』 10년 12월 9일].

감귤은 종묘에 천신하고, 빈객(賓客)을 대접하므로, 그 쓰임이 매우 절실하다며 공납을 재촉하였고, 제주에서 진상하는 감자를 보내지 않는 것을 문책하였으니 관리들의 고충도 있었다[『연산군일기』 5년 11월 14일]. 연산군대에는 4월에 승지들에게 감자 8매를 내리며, 앞으로 모든 과실을 계절이 아니더라도 잘 저장하여 갑작스런 쓰임에 대비하라고 일렀다[『연산군일기』 11년 4월 20일]. 제주목사에게 귤[柑子]과 유감(乳柑)은 비록 이미 철이 지났지만, 따서 저장한 것이 있으면 봉하여 올리고, 나무에 달린 것이 있으면 가지에 붙어 있는 채로 올리도록 명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8년 3월 11일]. 제주 백성은 감귤나무를 가진 자가 있으면 수령들이 일괄적으로 징수를 하자 고초를 견디다 못해 나무를 베고[『성종실록』 20년 2월 24일], 몰래 나무의 밑동에 불을 질러 관가의 징수 독촉을 피하기까지 하자 선혜청(宣惠廳)이 제주에서 봉진하는 감자의 수량을 줄여 줄 것 등을 아뢰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즉위년 11월 3일].

애써서 징수한 감자는 운송 방법도 문제였다. 감자를 처음 따서 껍질이 두껍고 몸이 단단한 것을 골라 저장하면, 비록 4~5월에 이를지라도 빛깔과 맛이 변하지 아니하니, 마땅히 골라 담아서 단단히 봉하고 거듭 싸서, 별도로 진상하게 하였다.

조선시대 감귤류의 종류는 다양하였다. 금귤(金橘)과 유감과 동정귤이 상품이고, 감자와 청귤(靑橘)이 다음이며, 유자와 산귤(山橘)이 그다음이라 하였다[『세조실록』 1년 12월 25일]. 또 귤(橘)과 유자는 3월에 열매를 맺어 9월에 익기 시작하여 겨울에 따는데, 반쯤 익었을 때에 씨를 받아 심으면 유감이 감자가 되고, 감자가 유자[柚]가 되고, 유자가 탱자[枳]가 된다고 하였다. 유감을 심어 감자가 된 것은 몸이 작고 껍질이 연하고, 잘 터지며, 그 맛이 보통 것보다 갑절 좋으나, 봉하여 진상할 때에 부드럽고 연함으로 인하여 쉽게 물러 허물어지므로, 다방(茶房)에서 퇴각하고, 논핵이 뒤따라 일어났다. 따라서 수령들이 책임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맛이 좋은 물건을 공상(貢上)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별도로 그릇을 만들어 담고, 사이에 다른 물건을 끼워서 부딪쳐 깨지지 않게 하고, 표를 싸서 특별히 올리게 하라는 등 진상 과정 중 감자의 품질 유지를 위하여 포장 방법을 고민하였다.

[연원 및 용도]
감자가 진상되면 왕은 진상된 감자를 왕족이나 신하들에게 내려주었다[『세종실록』 7년 11월 2일]. 성종은 북쪽 오랑캐 정벌에 나섰던 우의정(右議政)이 병을 얻자 사탕[砂糖]·감자·귤 등의 물품을 내려주고, 어의를 시켜 병을 치료케 하였다. 성균관(成均館) 유생들에게도 나누어주고, 시험을 보게 하였다[『숙종실록』 39년 12월 20일]. 이것이 일명 황감제(黃柑製)이다.

태종은 이양우(李良祐)의 죽음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소선(素膳)을 하였다가 이명덕(李明德)·목진공(睦進恭) 등이 올린 고기반찬[肉膳]을 허락하고, 감자 한 그릇씩을 내려주었다[『태종실록』 17년 2월 7일]. 중종은 감자와 어제시(御製詩) 10수(首)를 정원에 내리면서 승정원(承政院)·홍문관(弘文館)·시강원(侍講院)·예문관(藝文館)·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에 나누어 주고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중종실록』 34년 11월 16일].

감자는 이웃 중국과 일본과의 교류에도 이용되었다. 태종대에는 대마도좌위문대랑(對馬島左衛門大郞)이 감자 320개를 바쳤다[『태종실록』 18년 3월 15일]. 정종대에 일본이 사신을 보내 방물과 감자·매화(梅花)를 각각 한 분씩 바쳤다[『정종실록』 2년 8월 1일]. 세조는 류큐국 사신에게 술과 고기와 감자 등의 물건을 내려주었다[『세조실록』 8년 1월 5일]. 『해유록(海游錄)』에는 일본에 귤과 감자 등 나무열매가 가득하였는데, 색이 노랗고 특이한 향기가 풍기며, 그 맛이 시원하고 단 것을 왜인들은 밀감(蜜柑)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인조대에는 감자, 유자, 석류(石榴) 등의 과일을 선전관(宣傳官)을 정하여 청나라의 심양(瀋陽)으로 보냈다.

감자는 주로 생과로 먹거나, 꿀에 졸여 정과로 이용하였다. 감자정과는 3가지 방법으로 만들 수 있다. 감자의 속 쪽을 곱게 다듬어서 꿀에 잰 정과(正果)와 감자의 껍질을 잘게 썰어 꿀에 버무려 약간 볶은 정과, 감자를 통째로 2푼 정도의 두께로 썰어 꿀에 잰 정과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감자는 껍질은 버리고, 속은 흰 허물을 죄 벗긴다. 제사에는 가로 썰어 씨를 없애고, 먹는 것은 쪽을 내어 허물을 곱게 벗겨 꿀을 녹여 부어 쓴다. 감자와 귤은 무와 함께 더운 데 두면 봄에도 썩지 않는다고 하였다. 『음식책(飮食冊)』에는 겨울철 교자상에 올리는 과일이고, 『윤씨음식법(尹飮氏食法)』에 감자정과는 효도 찬합 음식으로 쓴다 하였다.

감자는 찬 성질이 있다. 위를 맑게 하고, 대변을 부드럽게 하여 변통을 원활하게 한다. 또 갈증과 숙취를 해소하는 약재로 쓰였다.

[생활민속 관련사항]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제주에서 생산되는 금귤, 감귤, 청귤, 유감, 감자, 유자 등에 대한 맛을 서로 비교 평가하였다. 『완당전집(阮堂全集)』에도 14종의 감귤류에 대한 평가가 실려 있다. 동정귤·당금귤·소귤(小橘)·금귤 4종이 상(上)이고, 별귤(別橘)은 품종이 가장 귀하나 종자가 몹시 드물어서 능히 공납에 충당을 못한다. 산귤은 가장 많으나 가장 하질이며, 청귤·석금귤(石金橘)은 다 맛이 좋지 못하며 대귤(大橘)은 보지 못했으며, 감자·등자는 다 중국이나 일본산만 같지 못하다. 유감은 조금 시원하나 산미(酸味)가 많으며 당유자(唐柚子)는 농창하게 익어 봄을 지낸 것이라야 달고 시원하다. 감자는 향이 없으며, 지각(枳殼)은 청귤과 함께 약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규합총서(閨閤叢書)』
■ 『도문대작(屠門大嚼)』
■ 『부상록(扶桑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윤씨음식법(尹氏飮食法)』
■ 『음식책(飮食冊)』
■ 『해유록(海游錄)』

■ [집필자] 차경희